작성일 : 20-02-28 16:51
하나님의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 충남대 명예교수 임종석
 글쓴이 : 안타레스
조회 : 830  
하나님의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 충남대 명예교수 임종석


기도가 무엇이기에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요 기도는 그 호흡이다.’
근년에는 거의 들은 적이 없으나,
필자는 처음 믿기 시작한 초신자 시절부터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이 같은 내용의 말을 빈번히 들어왔다.
초신자 때는 아는 것이 없으니 그저 그럴 거라 생각했고,
갈수록 그렇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믿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자기최면의 결과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게 명색이 목사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냐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사실이니 어쩌랴.

필자는 초신자 때부터 나름 기도에 힘써 왔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열심 있는 교인들이 하는 것을 따라
금식기도라는 것도 해 보았다.
초신자를 면했을 무렵에는
그 금식기도를 교회 교육관의 한 방에서 하기도 했다.
말이 교육관이지 70년대 초의 시골인지라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흙벽으로 지은 방 몇 개의 기다란 집이었다.
그런데 그 방이 얼마 전에 폐결핵을 앓던 청년 교인이 죽었던 곳이었다.
죽을 날이 가까운 중증이다 보니
전염의 우려 때문에 집에도 있지 못하고
교회와 사택에서 거리가 조금은 떨어져 있는 교육관에 와서
기거를 하다가 죽은 것이다.

그 뒤 방을 독하게 소독을 하여
필자가 기도를 시작했을 때에도 냄새가 여간 고약한 것이 아니었다.
그게 필자에게는 시체의 냄새처럼 느껴졌다.
배고픔에 그 같은 정신적 고통까지 겹쳐
닷새간의 기도가 끝나자 후유증으로 고생을 했다.

중년에는 하나님께서 꼭 이뤄 주시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서 기도를 시작했다.
앞으로의 인생길이 결정지어지는 중대사가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단독주택에 살았는데 주로 그 반지하 공간에서 했다.
반지하라 해도 요즘 국민들의 자존심을 한껏 드높여 준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그런 곳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열악한 창고였다.

퀴퀴한 냄새까지 짙었지만 돗자리를 펴고
이불을 갖다 놓아 가끔은 잠도 자며 기도했다.
그러나 기도가 잘 되지 않은 때도 많았다.
악을 쓰듯이 소리만 커졌지 마음이 실리지 않아 애를 먹은 일이 많았다.

사흘씩의 금식을 너무 자주하다보니 몸이 쇠약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보니 기도하다 탈진하기도 했다.
만약 하나님께 이뤄 주시지 않는다 해도
기도가 모자라서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기도했다.
어떻든 기도는 이뤄 받았다.

또 한 번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죽는 것이 낫다 할 정도로 엄중한 일이 덮쳐 와 기도를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 했지만 그게 되지 않았다.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기도하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기도하려고 자리에 앉으면 잠이 쏟아져 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 열 시간씩 잠을 자는데도 마찬가지였다.
1분 아니라 단 30초도 눈꺼풀이 내려앉아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
이불을 벽에 쌓아 놓고 물구나무를 서
거기에 기댄 채 해 보려 해도 잠을 이길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며칠간이나 그랬는지 기억은 없으나
어느 날부터인가 잠의 방해를 받지 않고 기도를 하게 되었다.
한 번 앉으면 두 시간 정도씩 기도하게 되었다.
성령체험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로 많이 했다.
신비주의자라 오해 받는 것도 싫고,
읽는 분들에게 득이 될 것도 없을 것이기에 생략하지만,
그중 하나만 말하면 이런 것이었다.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눈앞에 기체도 아니요 그렇다고 구체적인 물체도 아닌
가로로 된 타원형의 것이 시각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게 하나님의 임재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
이유도 모르는 눈물과 콧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며
은혜에 젖어 들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 또한 이뤄 주셨다.

그 후로 얼마 전까지 기도에 좀 깊이 들어가면
머리로부터 상반신에 걸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찌릿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필자는 그런 현상을 거부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더 이어지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성령께서 함께 해 주시는 싸인 정도로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인생 말년에 들어 또 하나의 시련이 덮쳐 왔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면 해결될 수 없는 시련 중의 시련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도밖에 없었다.
구하라 주실 것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기도로 이뤄 받은 사례를
필자는 그때까지 보지 못했다.
방법은 달리 없다 생각했다.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서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너무 급박한 상황이다 보니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며 그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러면 이루리라.”(요15:7)
그때는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황망 중에 그리 생각한 것이다.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기도에 썼다.
일상을 접고 기도에 초점을 맞추어 생활했다.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 말고는 외출도 하지 않았다.


종은 인격조차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하자 이변이 생겼다.
그 기적 같은 일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확신이었다.
기도하다가 만세를 불렀다.
말씀이 새롭게 조명되며 깨달음으로 가슴에 박히는 일이 많았다.
이 말씀과 저 말씀이 연결되기도 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구하는데도 이뤄 받지 못한 이유도 알게 되었다.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이 모든 것’, 그러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6:31)하는 육적인 것들을 ‘먼저’ 구하니
이뤄 주시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것도 열심히 기도하여
이뤄 받고 저것도 이뤄 받았는데 무슨 말이냐 하지 말라.
군것질 좋아하는 아이가 하도 울며 떼를 쓰니
나쁜 줄 알지만 조금은 주는 엄마의 마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구해야 하는
‘그 나라와 그의 의’는 무엇일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 즉 하나님 안에 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요14:20)을
말씀하시기도 하는데,
이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
우리가 모시고 사는 주인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안에서 모시고, 우리 안에 모시고 사는 주인님이라는 말이고,
따라서 우리는 종이라는 의미가 된다.

종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격조차도 있을 수 없다.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라하기 전에
주인의 의중을 알아 하려는 마음이 인격이고,
그리하는 것이 충성된 종이다.
주인의 뜻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수는 있으나
그리하면 돌아오는 것은 매뿐이다.
심하면 죽임까지도 당할 수 있다.

크리스천도 마찬가지다.
찬송가 가사에
‘나의 품은 뜻 주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540<통219>장)
라는 게 있다.
그렇다.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격이어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모시고 그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빌2:5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 말하고 있다.
예수님을 안에 모시고 그 마음으로 살라는 말인데,
그 마음이 곧 우리의 인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되면 우리는 어찌 되는가.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의 말씀이다.
여기에서의 ‘빛’이나 ‘착한 행실’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참 빛’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요1:9).
그러나 그분을 우리 안에 모심으로
우리는 그로부터 나오는 빛을 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다는 말이다.

진정한 ‘빛’으로서의 ‘착한 행실’은 크리스천만이 할 수 있다.
그냥 ‘착한 행실’은 믿지 않는 사람도 할 수 있으나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이 세상 물건 불탈 때 타버릴 수밖에 없는 행실이다.
배려도 그렇고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면 어떻다는 것인가.
피조물인 사람은 조물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섭리이다.
그리고 피조물은 조물주의 섭리에 따라 살 때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살진 돼지를 보고 행복하다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체험적으로 깨달아 안다면
하나님을 안에 주인으로 모시는 데에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안에 모시고 그 마음으로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이다.
그리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말씀이다.
성경 66권의 말씀이다.
그게 가능한가.
성경 66권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능한가 말이다.
물론 불가능하다.
그런데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는 하시지 않는다.
그런데 아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벧전116)하라 하시지 않았는가.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말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며 당신의 거룩을 향해 달려가는 것만으로
이미 거기에 도달한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
그러니 은혜인 것이다.
그 방대한 성경 66권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데,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그게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살려고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만도
목표에 도달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니 은혜인 것이다.


말씀은 믿음 즉 속사람의 뼈와 살과 피다

그 방대한 성경 66권의 말씀도 압축하고 압축하면
단 두 글자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랑’으로 압축된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고
“하나님은 사랑”(요일4:8)이시니 정확한 표현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필자는 하나님을 자신의 안에 모시고 그 마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 했고,
성경 66권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리 살 수 있는 것일까.
모두에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라 했는데,
우리는 정말 말씀을 그리 쓰고 있는가.
말씀을 먹어 소화시킴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영양분으로 하고 있는가 말이다.

성경을 몇 십 독 했다,
심지어는 몇 백 독 했다는 사람도 있는데,
필자는 그런 사람이 조금도 부럽지 않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도 그다지 부럽지 않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 알아도 그대로 살려 노력하는 사람은 부럽기 그지없다.
성경은 읽어 지식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읽어 실천하기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지식과 믿음은 별개일 수 있다.
물론 모르고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안다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만은 아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이므로
읽는 것만으로도 믿음의 성장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믿는 사람치고 누군들 믿음 좋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말씀이 생명의 양식되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바라고 원해도 뜻대로 되지 않으니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호흡이라는 기도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 또한 잘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하루에 한 번은 기도를 인도해 주시라 심도 있게 기도한다.

그런데 그 기도를 어떻게 인도해 주시라
구체적으로 하려 하면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기도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온몸과 온 마음으로 하는 기도,
더 나아가서는 온몸과 온 마음을 바쳐 하는 것이
좋은 기도라는 것은 안다.
그것이 순종을 전제로 하는 기도이니
좋은 기도라는 것은 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기도는 기도 때만이 아니라
끝난 뒤의 일상과도 연결되는 것이니 좋은 기도라는 것을 안다.

구체적으로 구하는 것은 이 정도로 끝이다.
그러니 그 다음은 그냥 막연히 기도를
하나님의 더욱 큰 사랑의 은혜로 인도해 주시라,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그 뜻으로 인도해 주시라 기도한다.

따지고 보면 무엇이나 그렇지만,
영적 활동인 기도는 하나님의 인도,
성령님의 인도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필자는 기도하면서 성령님이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내 지식으로는, 내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는 내용의 기도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할 때가 있는데, 그런 때가 그렇다.

필자는 성경을 읽는 것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은 필자는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건강과 체력,
그리고 집중력과 이해력과 기억력을 주시라고 기도한다.
여기까지는 믿지 않은 사람들이 독서를 할 때도 필요한 것들이니
성경 읽을 때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 이런 것들 외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성령의 도우심,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정독을 해도 지식만으로 남을 뿐
믿음의 성장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성령님께서 도와 인도해 주셔서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옵시고,
그것이 믿음 즉 속사람의 구성요소인 뼈와 살과 피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그 하나하나가 속사람의 골격과 근육과 혈액이 됨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는 목적이 있다.

우리는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425<통217>장> 찬송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당신의 모양으로 사람을 만드셨는데(창1:26),
그것은 외양이 아니라 속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피조물인 사람이 조물주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그 형상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진흙과 같은 우리를 말씀으로 다시 당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도 모르는 것이 있는가

필자는 찬송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 외에도
이뤄 받기 위함이 아닌 기도를 하기도 한다.
기도를 하는 것은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모르시기 때문이 아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시지만 기도하라 하신 것은
당신과 당신의 자녀들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셔서이다.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라는 말이다.
당신의 형상을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주제넘다 생각들 하시겠지만
필자는 온 인류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지구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지구촌 모든 곳에서 옳은 것들이
항상 옳지 못한 것들보다 우위에 있게 하소서,
옳은 것들이 항상 옳지 못한 것들을 이기게 하소서,
기도한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누리며
최소한의 인간존엄을 잃지 않게 하여 주소서,
기도하다.

물론 나라를 위한 기도도 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국민이 자기의 위치에서
바른 가치관으로 올바른 국가관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게 하여 주소서,
기도한다.

이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그보다는 그리하는 것이 피조물로서
조물주의 창조섭리에 순응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떠한 기도가 됐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무위로 돌리시진 않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 또한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 지음을 받았다 전술했다.
그런데 그리 되려면 하나님의 뜻인 성경 66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우리의 안에 품고 그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의 말도 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기도가 필수라는 말 또한 했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의 삶 전체를 예배로 드리라는 말이 된다.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해서 살아가는 일상이 영적 예배라는 말인데,
달리 말하면 예수의 마음을 안에 품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일상의 삶을 하나님께서
향기로 기쁘게 받으시는 산제사로 드리는 예배가 된다는 말이다.

전술했듯이 필자는 인생 말년에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덮쳐 와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며
죽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시작한 기도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기적을 이루어 주시기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루시려 하신 뜻이 계신다는 것이 그것이다.
임종석 사람 만들기, 예수 그리스도 사람 만들기가 그것이다.

그리고 기도하며 이 기도는
‘하나님의 임종석 사람 만들기,
예수 그리스도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께서 기도의 우선순위까지 정해 주신 것이다.

필자는 지금 열심히 그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그 하나님의 기적도 일어나고 있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는 불가능하기만 했던 그 기적이
또한 진행 중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의 변화가 진행되는 삶,
그런 일상,
그것이 하나님께서 향기로 기쁘게 받으시는 산제사로서의 예배가 아니겠는가.
오,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가.

 - 충남대 명예교수 임종석

윤지 20-02-28 18:10
 
하나님은 사랑하고, 베풀고, 함께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를 드리기 전에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그 믿음에 반드시 보답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리아나 20-02-28 18:15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노력하는것이 진정한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함으로써 제 삶에서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리라 믿고 그런 삷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유진짱 20-02-29 21:33
 
예배 말씀 중에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 주실 것이고,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때에는 다른 쪽으로 들어주신다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욕심 내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질 거라는 걸 믿고 있습니다.
행양 20-03-01 17:59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벗어나기 위해 기도를 하고 그 기도가 기적으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하루에 조금씩 기도를 올립니다.
홍석태 20-03-03 11:18
 
기도의 힘, 기도의 필요성, 기도의 능력을 하나씩 알아갈 수 있는 귀한 글입니다. 앞으로 더욱 기도를 생활화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훈훈 20-03-04 20:21
 
이 글을 읽으니 오늘 성경공부 시간의 목사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신대, 원하는 것을 들어달라고 기도 하기 보다는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를 기도해야겠습니다.
공주아빠 20-03-04 20:56
 
이세상의 삶에 대한 기도는 모두 하나님이 아신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삶이 기도가 될 수 있는 그러한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피아 20-03-05 09:19
 
말씀은 생명의 양식이요 기도는 그 호흡이다라는 말씀처럼 성경대로 살려 노력하는 자녀가 되기 원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녀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박효인 20-03-05 21:54
 
욕심내지 않고 기도하고 늘 말씀을 가까이하며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규연애비 20-03-06 15:50
 
기도는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소망,희망이라는 생각이 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전달하시고자하는 기도는 항상 우리삶이라고 말할수 있을듯합니다.
행복가득 20-03-08 21:59
 
참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심은 믿음이 있다는 것이고 결국은 착한 행실이 날 수 밖에 없으며 그 삶이 기도의 삶이고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 곧 예배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