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2-23 18:50
성경용어 올바로 알기 1장 ~ 5장 (1장. ‘침례(세례) 요한’ 2장. ‘갈보리’ 3장.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 4장. ‘구제, 구제헌금‘ 5.장 ’막달라 마리아‘.)
 글쓴이 : 별빛
조회 : 3,652  
<성경 용어 올바로 사용하기 (1장)

1. ‘ 침례(세례) 요한’

흔히 ‘침례(세례) 요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판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침례(세례) 요한’에 대한 헬라어 원어는 요아네스 호 밥티스테스 Ἰωάννη&#962;ὁ
βαπτιστὴ&#962;이며 영어로는 John the Baptist입니다(헬라어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여기서 헬라어 어미 -테스 - τὴ&#962;는 -하는 '사람'을 나타내며, 영어의 -er, -ist와 같
습니다. 따라서 영어 baptist가 침례하는 사람, 침례자를 가리키듯이 헬라어 호(정
관사) 밥티스테스 ὁβαπτιστὴ&#962;도 '침례(세례)자(者)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은 이를 '침례 요한'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과 카톨릭 성경은 모두 올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침례자 요한'을 '침례 요한'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교사 바울'을 '선교 바울'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고
'목회자 한경직'을 '목회 한경직'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음악가 모차르트'를 '음악 모차르트'라고 부르는 것이며,
'미술가 피카소'를 '미술 피카소'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옳지 않은 표현입니다.
꼭.. "침례자(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릅시다.

<성경 용어 올바로 사용하기(2장)>

2. 갈보리

찬송가 150장은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라고 시작합니다.
‘갈보리’라는 이름은 교회명 또는 기독교단체명 등에서도 드물지 않게 사용됩니
다. 하지만 ‘갈보리’라는 단어는 개역개정판이나 새번역 등 우리말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말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무슨 근거로 사용되
게 되었을까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후에는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이르신 장면을 네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마태와 마가는 ‘골고다’라는 아람어( גּלְֻגּלְַתָּא , 굴갈타) 지명을 사용하며 그
것의 의미가 헬라어로 해골(Κρανίον, 크라니온)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2. 누가는 ‘골고다’라는 아람어 지명은 언급하지 않고 그저 헬라어로 ‘해
골’(Κρανίον, 크라니온)이라고 불리는 장소라고만 설명한다.
3. 요한은 헬라어로 소개하며 그 아람어 명을 전한다.
즉, 그 지명은 아람어로는 ‘골고다’이며 그 의미는 ‘해골’이며 헬라어로는
역시 해골을 의미하는 ‘크라니온’이라고 번역된다.

보는 바와 같이 성경은 원어로 볼 때에 아람어 ‘골고다’ 또는 동일한 의미의 헬
라어 ‘크라니온’만을 사용하고 있다. ‘갈보리’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라틴어 성경(Vulgate)에서 소위 ‘갈보리’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라
틴어로 해골은 Calvariae(칼바리에)로서 라틴어 성경은 당연히 헬라어 크라니온
(해골)을 동일한 의미(해골)의 라틴어로 Calvariae (칼바리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의 네 성경 구절 모두에 우리말로 ‘해골’이라는 단어가 있는 부분
은 라틴어 성경은 라틴어의 해골인 ‘칼바리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사
용하고 있는 ‘갈보리’라는 말은 라틴어 Calvariae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옛날 라틴어 성경에서 사용되었던 라틴어 용어가 지금까지도 사
용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 과정은 좀 황당합니다. 17세기에 나온 킹 제임스
(King James) 영어 성경은 라틴 벌게이트를 참조하기도 했는데... 위의 구절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해골’(Κρανίον)이란 말을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서
는 정상적으로 skull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유독 누가복음 23장 33절에서만
skull이라는 영어로 번역하지 않고 라틴어를 그대로 음역해서 Calvary(캘버리)라
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말로 ‘갈보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원래Calvary는 영어 단어가 아닙니다. 영어에는 이런 단어가 없습니다.
단지 라틴어Calvariae 를 영어식으로 음역해서 옮긴 것입니다.
킹 제임스 번역이 알 수 없는이유로 이 구절에서만 라틴어 음역을 사용했기 때문에
Calvary라는 단어가 성경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언급한 바와 같이 킹 제임스 버전은, 일관성 없이, 다른 병행구절에서는 영어 Skull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동일한 헬라어 단어 크라니온(Κρανίον)을 오직 이 구절에서만 헬라어도 아니고 아람어도 아니고 라틴어단어를 사용해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Calvary라는 단어는 라틴어이며 올바른 영어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
후의 영어 번역들과 킹 제임스 번역(뉴 킹제임스 포함)을 제외한 어떤 현대 영어
성경들도 이 단어는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갈보리’라는 말은 라틴어 ‘칼베리에’(Calvariae ,
영어 캘버리, Calvary)에서 왔는데, 이 표현은 킹 제임스 계열의 성경에서만 나타
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말 킹 제임스 번역도 ‘갈보리’라는 단어를 그대
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우발적으로(아니면 실수로?) 또는 이유 없이 라틴어가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음역되어 전해진 ‘갈보리’(Calvary), 영어 성경들 중에서도
킹 제임스 번역에만 있고 킹 제임스역에서도 누가복음 단 한 구절에만 있는
Calvary라는 단어가 이렇게 널리 퍼지게 된 것입니다.

‘갈보리’라는 이름을 교회명이나 단체명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 말의 유래
를 알고 있을까요? 그 말의 유래뿐만 아니라 그 단어의 의미가 ‘해골’이라는 것
도 알고 있을까요?
원어를 사용하고 싶다면 ‘골고다’가 아람어 오리지널입니다.
아무런 의미 없는 ‘갈보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맙시다.
그럼 찬송가 150장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골고다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성경 용어 올바로 사용하기 (3장)>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개역개정판에서도 이러한 표현은 39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은 자신의 어떤 일이 잘 되거나 자신이 수
상(受賞 )을 하거나 했을 때에 “오늘의 영광을 부모님께 돌립니다”라는 식으로 사
용하는 표현입니다. 즉, 사실상 자신이 잘해서(?) 받게 된 영광의 공로를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 ‘돌릴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경우는 원래부터 자신이 잘 해서 자신이 받아야 할 영광이란
것이 없습니다.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거나 하나님 자신이 큰 일을
행하신 것이기 때문에 ‘돌릴 것’이 없습니다. 원래부터 하나님 것인 영광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우리말 표현의 의미로 ‘영광을 돌리다’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
는 구절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본다면, 이 표현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실례1) (마 9: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니라
예수께서 자신에게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시고 중풍병
자를 고치신 후 무리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잘 되
었거나 자신들이 수상했거나 등등 자신들에게 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닙
니다. 우리말에서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자신에게’
어떤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그 공과 영광을 타인에게 돌릴 때에 사
용합니다. “당신이 오늘 수상하게 된 영광을 나는 우리 선생님께 돌립니
다’와 같은 식으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즉, 타인의 일이나 객관적인 사건에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무리는 ‘두려워하며’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영광스러움을 가져다 준
좋은 일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서 우리가 받을 영광이 없는 상황이고 두려워하는 상황인데
 ‘이 영광을 부모에게돌립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례2) (눅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당하셔서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백부장이 한 말입니다.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백부장이 어떤 영광스럽거나 좋은 일을 맞
이하게 된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죽으시는 상황입니다. 무슨 영광을 돌립니까?

실례3) (계 11:13)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
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
라 정말 어울리지 않지요.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무서워 떠는데, 자신들이
받을 영광이 없는데, 돌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처럼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은 성경 구절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잘못된 번
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판에서 39회 사용된 ‘영광을 돌리다’라는 번역은 세 가지 종류의 헬라어
표현들 중에서 일관성 없이 번역한 것입니다.

39회 중, 24회는 doxa,zw (독사조, 영화롭게하다)를 그렇게 번역했고,
9회는 di,dwmi + do,xa (디도미 + 독사, 영광을 드리다)를 그렇게 번역했고,
6회는 단지 ‘영광을 위해서,’ ‘영광이 하나님께…’라는 문구인데 우리말에서
는 임의로 동사를 넣어서 ‘영광을 돌리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실제로 신약성경 전체에서 영광과 관련된 동사 중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
되는 것은 doxa,zw (독사조, 영화롭게하다)입니다. 이 동사는 신약성경에 모두 61
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동사의 목적어는 거의 모두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 그분 자신을 영화롭게 해 드린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
님을 높여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됩니다. 하나님께 좋은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체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운 말입니다.

둘째로 사용되는 말은 동사 di,dwmi (디도미)와 명사 do,xa (독사)를 함께 사용하
는 것으로서, ‘영광을 드리다’(give glory)라는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모두 20
회 사용됩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원어상이나 의
미상 좋겠습니다. 또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다’라는 말을 사용합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라는 말은 잘못된 번역이고, 의미상으로도 잘못된 말입
니다.

<성경 용어 올바로 사용하기 (4장)>

4. 구제, 구제헌금

개역개정판 신약에 ‘구제’라는 표현은 15회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제’라고 번역
된 헬라어 명사는 ‘엘레에모수네’(ἐλεημοσύνη)로서 이 명사는 헬라어 신약성경에
서 13회 사용됩니다. 명사 ‘엘레에모수네’의 동사는 ‘엘레에오’(ἐλεέω)로서 신약성
경에서 29회 사용되며 개역개정판에서는 주로 ‘불쌍히 여기다,’ ‘긍휼을 베풀다’로
번역이 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be merciful’(자비롭다), ‘have mercy on’(자비를
베풀다)로 번역됩니다.

이처럼 이 동사는 ‘필요에 처하거나 곤궁한 사람에 대해 사랑의 마음으로 그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나 행동의 핵심은 ‘자
비와 사랑’입니다. 이 ‘자비, 사랑, 긍휼’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마
18:33). 이러한 마음으로 약하거나 곤궁한 사람을 애틋하게 사랑하는 자는 ‘복되
다’고 예수께서 선언하십니다(마 5:7).

하지만 개역개정판은 이 동사는 ‘긍휼을 베풀다’로 번역하면서 이 명사(엘레에
모수네)는 ‘구제’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많은 교회에서 ‘구제’나 ‘구제 헌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제(救濟)’라는 말은 구할 구(救) + 건널 제(濟) = 구
(원)해서 건져낸다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에는 원어 엘레에모수네(자비, 사랑)의
의미는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즉, 이 표현은 원어와는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구원해서 건져’냅니까? 사실상 이 단어는 아주 불편하고
불쾌한 단어입니다. 그것을 행하는 자를 ‘갑(甲)’으로 만들고 그 대상자를 ‘을
(乙)’로 만드는 용어이며, 이를 행하는 자에게 잘못된 자기 의(義)를 입혀 줄 수도
있고 반대로 그 대상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는 표현입니다(loose-loose).
즉, 모두에게 좋지 않은 표현입니다.

원어의 의미를 고려한다면 ‘자선(慈善)’이라는 용어가 더 좋은 표현입니다. 사랑
(자비) 자(慈) + 착할 선(善)으로서 자비와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떤 용어로 표현하든지 대상자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그 중심입니다.
구제라고 번역된 명사 엘레에모수네(ἐλεημοσύνη)는, 흥미롭게도, 신약성경에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만 나타나며 그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
다. 사도 바울은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선교 여행을 하면서 여러 교
회에게 헌금을 준비하도록 요청했고 그 헌금들을 모아서 실제로 예루살렘 교회
에 전달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그 헌금에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도 ‘구제 헌금’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한 번도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에, 그러한 헌금을 하는 일을 ‘성도 섬기는 일’(διακονῶν τοῖ&#962; ἁγίοι&#962;)
이라고 표현합니다

(롬 15:25, 31; 고전 16:15; 고후 8:4; 9:1). 참으로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이 아니라, ‘거룩한 분들(성도, 聖徒, the saints)을 모
시는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치 헌금하는 자가 ‘을(乙)’이고 그 수혜자가 ‘갑(甲 )’
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런 마음과 이런 표현은 모두를 살리는 아름다운 표현
입니다(win-win).

‘구제’나 ‘구제 헌금’이라는 말은 잘못된 번역이며 아름답지 못한 말입니다.
‘자선’이나 ‘섬김 헌금’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합시다!
참고로 저희 교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구제 헌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섬김 헌금’이라고 바꾸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한 단어를 바꾸
어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 의미와 영향력은 대단히 큰 변화를 가져 올 것입
니다.

‘약자(弱者)’를 배려하는 바울의 마음은 로마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15장 1절에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원문에서 이 구절은 &#908;φ
ε&#943;λομεν 즉 우리가 ‘반드시 . . 해야한다’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 말은 행위의 당위
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 . . .에게 빚지고 있다는 뜻입니
다” 여기서 “당연히 갚아야한다” “당연히 . . 해야한다”는 의미가 파생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강한 자라면 그는 약한 자에게 마치 채권자(甲)처럼 행세하는 것이 아
니라, 오히려 채무자(乙)와 같이 빚진 마음으로 약한 자의 약점을 당연히 담당해
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 앞에서 오히려 약자처럼 행동해야 합니
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은 선
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성경 용어 올바로 사용하기(5장)>

5. 막달라 마리아

찬송가 211장은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라고 진
행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다고 들어 왔습니다.
즉, 아래와 같은 등식이 성립합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 = 막달라 마리아 = 창녀
하지만 이러한 등식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1) 향유를 부은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인가?
예수께 여인이 향유를 부은 사건은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 12:1-8
(자세한 설명은 해설 복음서 대조서 357-8쪽을 참조)
보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이야기는 거의 동일하고 요한복음 이야기
도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데, 누가복음 이야기는 그 장소나 인물, 내용, 사건의 의
미상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누가복음 이야기는 나머지 세 복음서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은 다른 사건을 그리고 나머지 복음서들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
고 있는데, 마태와 마가는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은 그
여인을 ‘마리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
라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요 12:1-3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
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
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
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보는 바와 같이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남매 중에 있는 마리아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 때와 부활하셨을 때
에만 등장하는데(마 27:56, 61; 28:1 등), 막달라는 지명(地名)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막달라 출신 마리아를 말하는데, 막달라는 갈릴리 바다 서쪽에 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다시피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는 베다니에 살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과 가까이에 있는 유대 지역입니다. 이 두 지역은 아주 멀리 떨
어져 있던 다른 지역입니다. 즉, 인근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오해될 리도 없습니다.

당시에 마리아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성경 저자는 이 여
자를 구분하기 위해 ‘막달라’(출신) 마리아라고 부른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다
른 마리아들과 혼동하지 않도록 일부러 구분한 것입니다. 즉, 막달라 마리아는 예
수의 모친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마 27:56), 마르다의 동생 마리
아(베다니 출신)와 구분되는 또 다른 마리아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서 저자가 그녀를 ‘막달라’(출신) 마리아라고 구분한 것입니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독자가 다른 마리아들과 혼동하지 않도록 구분한 것인데, 현대 독자들은 혼동하고
있는 셈이지요.
즉, 향유를 부은 여인은 나사로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였으며,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었습니다.

(2)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을까요?
이런 생각이 나오게 된 것은 위의 누가복음 이야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복
음은 ‘죄인’인 한 여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이 반드시 ‘창녀’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혹시 이 죄인인 여자가 창녀였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이 여
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보통 위의 네 복음서 이야기를 동일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
하며, 따라서 누가복음의 죄인 여자는 마리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마리
아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향유를 부은 여인 = 막달라 마리아
= 창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펴 본 바와 같이 이런 생각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오류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누가복음의 향유 부은 사건과 나머지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이 동일한
이야기라고 잘못 이해한 것
둘째, 그로 인해 누가복음의 죄인 여자가 마리아라고 잘못 이해한 것
셋째, 요한복음의 마리아가 막달라 마리아라고 잘못 이해한 것
넷째, 죄인은 곧 창녀를 의미한다고 이해한 것.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성경이 말해 주는 유일한 정보는 누가복음 8장 2절
에 있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
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동일한 말이 막 16:9절에도 나옵니다).

즉,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 고침을 받은 여인이라는 것
만을 말해 줍니다. 그외에 그녀가 창녀였다는 언급이나 어떤 죄를 지은 죄인이었
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앞서 처음에 제시한 등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 ≠ 막달라 마리아 ≠ 창녀

(3)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누구인가요?
누가복음 10장 39절에 의하면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열심히 듣던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여인이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요 11:5). 즉,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
아도 아니며, 죄를 지은 여인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향유를 부은 사건,
즉, 예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으로서 예수께서 길이 전해질 것이라고 칭찬하신
그 향유 부은 사건의 주인공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였으며, 그 마리아는 죄인이
나 창녀가 아니라 예수께 사랑 받고 예수님을 말씀을 열심히 듣던 여인이었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 = 베다니 마리아 = 말씀 열심히 듣던 여인
(마르다 동생)
(찬송가 211장은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베다니 마리아 본 받아서…”라고 고쳐
야 할 것 같습니다).

(4) 누가복음의 향유 부은 사건(7:36-50)
누가복음의 향유 부은 사건은, 처음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장소, 인물, 내
용, 의미 모두에 있어서, 나머지 복음서에 있는 사건과는 다른 독립된 사건입니다.
다른 세 복음서의 향유 부은 사건은 마리아가 예수의 장례를 예비한 것으로서, 제
자들조차도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던 상황에서, 마리아
가 예수의 죽음과 장례를 준비했다는 점에서 칭찬 받은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그 여자가 비록
죄인이었지만 그녀를 가까이 하셨고, 그 여자는 예수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내용과 교훈을 지니고 있습니다.

(눅 7:45-48)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제 사건들과 인물들을 혼동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