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9-23 13:23
요지경은 세상 아닌 교회 - 충남대 명예교수 임종석
 글쓴이 : 안타레스
조회 : 1,055  
요지경은 세상 아닌 교회 - 충남대 명예교수 임종석


최 선배님, 목사안수를 왜 받지 않으셨어요?

필자의 인생살이는 거의 모든 과정이 늦깍이였는데,
신학 역시 신대원을 집 나이로 60에 나왔으니
늦깍이도 그런 늦깍이가 없었던 게 아니었던가 싶다.
그렇다 보니 어려움도 없지 않았다.
졸업에 목회현장실습이 필요했는데 받아 주는 교회가 없었다.
환갑이 코앞인 반쯤 노인네인데다가
그것도 대학교수라는 어쭙잖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받아 주는 교회가 있었다.
교인수 100명 남짓한 작은 교회인데
전도사가 열 손가락을 꽉 채운 숫자였고
그 중에 목회실습을 위한 사람이 칠팔 명이나 되었다.
모두가 40을 넘긴 나이였고 거의가 박사학위 소지자들이었다.
필자처럼 받아 주는 교회가 없어 고심했던 이들이었다.

주일 오후 설교는 전도사들이 돌아가며 맡아 했는데,
그 중의 한 번은 필자를 몹시 당황케 했다.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잘 모르겠다는 내용의 설교였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교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셔
그 천지를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설파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자는 것도 아니고 뭣인가 싶었다.
필자로서는 무모한 것인지,
용기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철이 덜 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분이 목회를 할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만약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긴다면
맹인이 맹인을 인도 하여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눈도 코도 귀도 없는 사람이
교인들을 아예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늦깍이로 신학을 한 어려움은 또 있었다.
전도사 시취 때였다.
‘왜 전도사가 되려 하세요?’
필자보다 20살 가까이 젊은 시취위원 목사님이 물었다.
믿음의 글을 쓰기 위해서라 했더니
사명감이 부족하다며 이번은 전도사니까 봐 주지만
목사시취 때는 어림없다 했다.
그러며 덧붙여 한다는 말이
글을 꼭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야 쓰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거였다.
딴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면 목회는 꼭 목사가 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나 그냥 입 꼭 다물고 있었다.

목사 시취 때는 다행이 그 젊은 목사님이 시취위원에서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그때 장애인 시설의 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시취서류를 시취위원 목사님들께 직접 가서 전해 드리라는
담임목사님의 귀띔이 있어 그대로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위원 목사님들의 환심을 사둘 생각에서였다.

위원 목사님 한 분은 도가 다른 도시에서 목회를 하셨기 때문에
도계(道界)를 넘어 몇 십 킬로를 운전을 해 가야만 했다.
가는 길에 억수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만나
고생 고생하여 모르는 길을 찾아갔다.
그 목사님 역시 나이가 필자와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났다.
필자를 앞에 앉혀 놓고 일장 연설 아닌 강의를 했다.
초딩들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문학론의 강의였다.
명색이 문학박사를 앉혀 놓고 말이다.
필자는 그 기가 막힌다고나 해야 할 그런 강의를 참고 듣느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다 났다.

또 한 목사님은 만나기 위해 역시 수십 킬로를 달려갔는데
사택에 계시지 않았다.
손님이 오셔 같이 낚시를 가셨다 했다.
시골이라서 근처에 낚시터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택은 교회 울안에 있었는데
마당은 마당인지 잡초 밭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러고도 교회가 잘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얼마를 기다려 서류를 전해 드리고
‘침례교회 집사의 특성’이라는 시취논문 제목을 받아 왔다.

시취위원 목사님이 다섯 분이었으니 다섯 편의 논문을 써야 했던 것이다.
제목을 받아든 필자는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담임 목사님께 여쭤 받으나 감이 잡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필자가 나온 신학 대학으로 한 교수님을 찾아가 봤으나 성과는 없었다.
성경을 뒤져 가며 나름대로 써 보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퇴자,
힌트라도 좀 주시라는 필자의 통사정은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수정하여 다시 제출했으나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섬기는 교회,
그러니까 장애인시설에서 열린 지방회의 때
‘침례교회 집사의 특성’도 모르다니
침례교 목사의 자격이 없다고 대중 앞에서 망신을 주었다.
결국 담임목사님께서 시설에서 기르는
웬만한 개만한 장닭 한 마리를 산채로 들려 준 뒤에서야 통과되었다.

좀 나중 일이기는 하지만
선배교수이자 신대원 선배기도 하신 최재석 교수님께서
목사안수를 받지 않으신 것은
혹 이런 꼴 저런 꼴 보지 않으려 해서가 아닌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요지경은 세상 아닌 교회

목회현장의 단면을 이토록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그리고 가끔은 목사들의 비리를 소재로 하여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인데도,
교계의 ‘현실’은,
교회를 ‘은퇴하는 담임자가 후임자에게
은퇴비나 퇴직금 조로 돈을 받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고 한
한 칼럼에 적잖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회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신앙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마치 우물안개구리가 우물 밖 세상을 논하고 평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자성의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깊은 바다의 밑바닥에 사는 물고기라 할지라도
성경(聖經)이라는 잠망경으로 수면 밖을 본다면
바다위의 세태(世態)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문제는 성경적 사고로 신앙을 보느냐
세상적 관점으로 보느냐에 있는 것이다.
이리 말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생각이라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부정한다면 기독교가 아니고 교회도 아니다.

‘은퇴하는 담임자가 후임자에게
은퇴비나 퇴직금 조로 돈을 받는 것이 일상’이 된 게 현실이라면
그게 어디 기독교이고 교회인가.
성경은 성경이고 현실은 현실인 이 기막힌 현실이 사실이라면
이 글을 쓰신 필자 목사님의 말씀처럼 10년 후쯤의 한국교회 상황은,
1/3정도는 없어질지도 모를 정도로 어려울지도 모른다.
젊은 사람 별로 없고 늙은 교회에 목회자도 늙어가고 하니 자연사할지도 모른다.

어떻든 이 글에서는
신앙을 지켜(守)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 별로 읽혀지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의 현실적인 이야기에 더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이 글을 쓰신 목사님께서는
표면적인 그 같은 내용의 행간 행간에 진짜 쓰고 싶으신
심오한 의미를 숨겨 두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텍스트의 행간에 숨은 의미를 찾아 쓴 논문도
적다고는 할 수 없는 필자조차도 찾아 읽을 수 없는 의미라면
일반 독자도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한다.
필자가 이 칼럼을 쓰는 까닭이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내용을 대상으로
필자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하여
먼저 글을 쓰신 목사님께 용서를 구하고 양해를 얻고자 한다.


은퇴할 때 후임자에게 돈 받을 거야?

“은퇴할 때 후임자에게 돈 받을 거야?”라는
가깝게 지내는 선배 목사님 물음에 글을 쓰신 목사님의 대답은 이랬다.
“전혀 받을 생각이 없어요, 지금은!”
‘후임자에게 은퇴금을 받는 것은
부도덕하거나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본능일 지도 모르겠다.
“지금은!”이라는 단서를 달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현실이다.
나도 막상 닥치면 어떻게 변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라는 것이 대답의 이유이다.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솔직한 대화인가.
그러나 이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소중하여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찾아 나서야 할 목자들의 이야기이다.
자칫했다가는 자기 양들이 실족해
벼랑에 떨어져 죽을지 모르는 목자로서의 목사들 이야기이다.

‘본능’이 어쩌고 ‘현실’을 저쩌고 할 일이 아니다.
예기치 못한 억장이 무너질 일을 막상 당하고 보면
필자라고 무슨 통뼈라고
무엇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마는
그러니 더욱 그러지 않게 해 주시라고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가깝게 지내는 그 선배 목사님은
수도권 중소도시에 교회를 개척하여
지방 내에서는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한다.
그런데 건축도 하고 주변 땅도 매입하다보니
적지 않은 부채가 있단다.
올해 50여 명의 새신자가 등록하였지만
 대부분 경제적 능력이 없는 ‘노인’이다 보니
교회가 목사님의 은퇴를 챙겨줄 수 있을지 걱정이란다. 

건축도 했는데, 왜 주변 땅까지 매입하느라
적지 않은 부채를 져야 했는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한해에 50여 명의 새신자가 등록할 정도라면 대단한 은총인데,
그 등록교인들이 대부분 경제적 능력이 없는 노인이라는 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그들 호주머니에서 나올 헌금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 선배 목사님은
자신의 인생을 거의 모두 바친 이 교회를 놓고 은퇴하기가
솔직히 아깝고 싫다고 한단다.
왜인가.
왜 아깝고 싫은가.
교회가 자기 개인 것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교회를 개척하여 그 성장을 위해 한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었다는 말인가.
글을 쓰신 목사님은 세습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선배 목사님은 현실적으로 소위
‘투 쿠션’, ‘쓰리 쿠션’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하는데,
무슨 말인가.

이렇게 되면 ‘은퇴하는 담임자가 후임자에게
은퇴비나 퇴직금 조로 돈을 받는 것이 일상’이 되듯,
교회세습이 보편화되는 것은 아닐지 모를 일이다.
글을 쓰신 목사님의 말마따나
결국 대형교회 목사의 자녀들이 아니면
큰 교회의 목회는 어렵게 되어
명문 목회자 가문이 탄생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10년 후쯤의 한국교회 상황은,
1/3정도는 없어질지도 모를 정도로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에 목사님은 자신의 ‘어설픈 예언’이
빗나가기를 바란다는 의미의 말씀도 하셨는데,
아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으면 그리되기를,
빗나가기를 위해 소극적인 생각으로 끝내고 말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도하며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이 따로 있나?

글을 쓰신 목사님께서는
아들이 어려서부터
‘맏이는 하나님 꺼!’라는 의미를 담아
목사가 되라고 세뇌를 시켰다 한다.
그런데 그 아들이 고등학교를 들어가야 할 즈음
목회현장과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가 성인이 되고 목회를 하게 될 무렵이면
더 힘들어 질 것이라는 생각에
영적으로 기쁨이 넘치고 사명감이 있는 아들이지만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꼭 목사가 되어야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건전한 직업을 갖고 사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라고 노선을 수정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 큰아들은 올해 대학 조리과에 입학했단다.

필자가 아는 한 선배는
자기 장남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주를 위해 피 흘리고 죽으라’는 의미로
‘주혈(主血)’이라고 지었는데,
좀 대조가 되지 않는가.
그런데
‘꼭 목사가 되어야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아니다’는 말은
소금이 짜다는 말보다 더 진리에 가깝다.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건전한 직업을 갖고 사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라는 말도 그렇다.
아니 ‘것도’가 아니라 ‘것이’라고 해야 한다.
불법적인 몇몇의 직업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직종이 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무슨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아닌 일로 갈린다.

목회를 해도 교회세습을 생각한다든가
성도들을 헌금 내는 물주쯤으로 생각하며 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을 기쁘게 하는 일이 된다. 
필자는 신대원 재학시절 나이가 많다는 유세로
동기생들에게
‘졸업을 하더라도 목회는 하지 마라.
그것이 하나님을 도와 드리는 일이다.
교회에 빈자리가 하나 나오면
서로 가겠다고 아우성이니 말이다.
정말 성경대로 살며 성경대로 가르치기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나도 쌍수 들고 환영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목회는 그만둬라’
라는 의미의 주제 넘는 말을 하곤 했다.

동기야 어떻든 목사님께서
아들의 진로를 목사 아닌 다른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하신 것은
정말이지 잘하신 일이다.
그 아들이 올해 대학 조리과에 입학했다니 늦었지만 축하드린다.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며 축하드린다.
먹는 사람의 건강과 즐거움을 위한 사랑의 마음으로
요리를 만든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목사님께서는 정년 전에 은퇴를 하려 해도
부모님 계시는 강원도에 가서 농시를 짓는 것 외에는
딱히 선택지가 없다 시며,
가끔 부모님을 도와드린 것 외에는
농사를 지어 본 적도 없는데,
문득 ‘빌어먹자니 부끄럽고,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하는
성경구절이 떠올랐다 하셨다.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다.
그런데 한 댓글이 그런 답답한 ‘현실’의 시원스러운 타개책을 제시했다.
그 요지다.

“빌어먹자니 부끄럽고, 땅 파자니 힘이 없고”
그래서 참된 종이 되라 함입니다.
참된 종은 그 주인의 은혜로 말미암아 빌어먹자니 부끄럽고,
땅 파자니 힘이 없음이 아니라
빌어먹더라도 감사하고 당당하며,
힘이 없어 힘이 들어도 그 길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하나님,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시고
지혜와 영감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로 글을 맺고 있는데,
어쩐지 필자의 가슴에는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이런 기도라면 글을 쓰시기 전에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필자의 비뚤어진 마음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목자는
양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목사다.
목회는 성도를 위해 웬만한 희생은 감수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결단을 내림으로 시작하는 사역이다.

                    충남대 명예교수 및 우리집공동체 원로목사 임종석

라새름 19-09-23 21:33
 
글을 읽어내리며 목사님의 걸어오신 길에 대하여 완벽히 알 순 없겠으나
목회자가 되시기 위해 많은 노력과 생각을 하셨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삶을 살아가면서 무언가의 일을 행하여야 할 때,
억지로가 아닌 희생정신을 가지고 진심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이가 되도록
제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홍석태 19-09-27 21:15
 
본질. 그 본질을 찾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하는 저와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조금 더 배우고 조금 더 성숙해지고 한걸음씩 나아가는 영혼이 되겠습니다.
공주아빠 19-10-01 02:17
 
올바른 목적의식을 갖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가는게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글 인것 같습니다.
목사라는 직분을 감당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계획하심을
자신의 감정과 주변의 분위기 가운데 타협하며 결정하지 않기를 이 시간 잠시나마
기도 해 봅니다.
영미 19-10-01 02:18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 이라는 찬송가 구절이 생각납니다.
목사 또한 주님의 귀한 양이겠지요
목사가 양을 위하고 양이 목사를 잘 따르는 것 또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적 사고를 가지고 현실에 순리하며 잘 이끌어 주시는 목사들이 많았음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저 또한 바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끝없는 노력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훈훈 19-10-02 06:41
 
성도를 위해 희생하고 노력하시는 많은 목사님들이 몇 몇 부정한 이들로 인하여
그 노력이 가려지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피아 19-10-08 18:47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목자가 되기 위한 길은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10년 후의 한국교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기도하며 노력해야 겠습니다.
두필님 19-12-03 22:11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부족하나마 항상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쓰임받을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