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1-30 14:18
사단은 무서운 존재 아닌 유혹하는 자
 글쓴이 : 임종석
조회 : 2,978  
=======================  사단은 무서운 존재 아닌 유혹하는 자  ==============================

  지극히 개인적이고 불확실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필자는 기도에 깊이 들어갈 때면 상반신에 전류가 통할 때처럼 찌릿찌릿 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그 원인도 실체도 알지 못한다.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싸인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나 짐작일 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사단의 소행일 가능성도 의심도 해 봤으나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런 현상이 있으면 기도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고, 그러면 또 더욱 강한 찌릿함을 체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도 내용도 더욱 성경적이 된다.

  믿는 사람이면 거의가 그런 것 같이 필자는 어느 교회를 방문하더라도 문이 잠겨 있지 않은 한 예배실에 들어가 뒷자리에 앉아서 잠깐일지라도 기도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그럴 때면 무척 조심스럽고 위험한 말이 될 수도 있는데, 앞에서 말한 것 같은 찌릿함을 체험을 하기도 하고,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한기를 느낄 정도로 냉냉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필자는 그런 느낌이 그 교회의 신앙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필자가 위험한 말 운운 한 것은 그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것이 자신의 신앙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필자는 의도적으로 그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는 말뿐 아니라 내색도 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성찰의 기회로 삼고 있으니 그것만은 유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느 설교에서 사단은 무서운 자가 아니라 유혹하는 자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사단이 유혹하는 존재라는 것은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유혹에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사단을 무서워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도 유혹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사단을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사단을 무서워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의 유혹에 넘어지고 만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사단은 결코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왜냐 하면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고,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사단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그 결과는 참담한 패배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단을 무서워하거나 그에게 지나친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실수로 인한 조그마한 상처조차도 사단의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같이 길을 걷던 육십 대 초반의 권사님 두 분 중 한 분이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졌고 무릎에 약간의 찰과상을 입었다. 이를 본 다른 한 분이 말했다.

  “아이고, 저런 마귀들이 또 극성을 부리네요. 기도해야겠어요.”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사단이 아니고, 기도도 사단을 염두에 두고 할 필요는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꼭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사단을 두려워하여 기도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사단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로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바르고 깊게 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룹총수의 자녀에게 해를 가하려는 사원은 없다.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절대자 하나님의 자녀인 믿는 사람들을 해할 자는 어디에도 없다. 사단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 사단은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가 느슨해진 틈으로 유혹의 올가미를 던져 넣는 것이다.

  하나님과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인데,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바른 관계이다. 그런데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하는 효도를 우리는 그분에 대한 사랑이라고도 하고 충성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하되 항상 사랑하신다.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니 모든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다 해결된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몸과 마음과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까울 것이 없는 그런 애틋하고 절절한 마음을 드리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다 해도 가진 모든 것 중의 물질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야 물론 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리면 된다.

  예수께서는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눅12:34)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마음이 됐건 물질이 됐건 지극히 소중하다. 그리고 헌금은 교회를 통해 하는 것이 보통이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무엇 하나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기독교의 크나큰 맹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몰라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놓아두지 말고 등경 위에 놓아두어야 한다(마5;14,15)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은 등불인 성도들을 교회라고 하는 말로 덮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아 반사하는 빛을 차단하여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예수의 비유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의 그 도움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의 제사 이상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마2545)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알고 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라 말하고,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요일4:230)다고도 말한다. 사람 사랑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이고, 사람에게 하는 것이,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해 드리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변에서 수 없이 만나고 있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즉 사회적 약자와 나누는 것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된다.

  어느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자기 교회 교인들이 장애인 시설에 가서 봉사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싫어할 뿐 아니라 가지 못하도록 막는다고도 했다. 밖에 나가 봉사를 하면 교회봉사의 손길이 줄어들 뿐 아니라 장애인들을 물질로 섬기다 보면 헌금이 줄어든다는 것이 이유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으로서의 할 짓은 아니지 않는가 싶다. 그런 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이 아니라 그분의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이요, 그리스도의 빛을 막는 차단자이다. 사단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사단은 무서운 자가 아니라 유혹하는 자라고 앞에서 말한 그 설교에는 이슈의 선점이 선거의 승리를 가져온다고 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선점하는 것이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어 간다는 것이었다. 2007년 12월에 있었던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BBK 사건이 터졌는데도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고, 지난해 12월에 있었던 제18대 대선 때에는 정수장학회 문제 등이 발목을 잡았는데도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것이 그 예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인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관심이 사단에게 선점된다면 우리는 그의 하수인이 되고 그의 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관심이 사단에게 점령당한다면 사단 그는 우리에게 그야말로 무서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을 관심 밖의 존재로 여겨야 한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결코 무서운 존재일 수 없다. 한 순간에 먹어치울 수 있는 우리의 밥이요, 발로 머리를 밟아 짓이겨버릴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기만 한다면 사단은 그런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