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2-13 12:27
예수의 동정녀 탄생, 사실(史實‧事實)인가 설화인가 - 충남대 명예교수 임종석
 글쓴이 : 안타레스
조회 : 2,324  
예수의 동정녀 탄생, 사실(史實‧事實)인가 설화인가  - 충남대 명예교수 임종석
— 크리스천다움이 교회성장의 지름길이다 —


상념 속의 위안부 할머니 한 분

잠깐 일본 센다이(仙台)에 다녀왔다.
지난 9월에 세상을 뜨신 은사님의 추모모임이 있어 다녀온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겠지만, 필자 또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실로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배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필자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싫어하는 일본의 그분을 가장 존경할 뿐 아니라
영향도 많이 받았다.
모임에는 제자들이 어림잡아 한 200명은 모인 것 같았다.
필자도 추모의 말(追慕辭)을 하는 몇 사람에 끼어 스피치를 했다.
“제가 선생님께 배운 것은 학문, 문학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오히려 인생에 있어서의 바른 길이 더 큰 배움이었습니다.”
필자가 한 스피치 중의 한 구절인데, 나에게 있어서의 은사님은 그런 분이셨다.
필자가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은 것은 1981년 2월이었는데, 역시 센다이였다.
우리 정부로부터 재외국민의 민족교육이라는 거창한(?) 임무를 부여 받아 가서
체재한 곳이었다.
일본은 혹카이도(北海道)‧혼슈(本州)‧시코쿠(四國)‧큐슈(九州) 등,
네 개의 큰 섬을 주축으로 한 많은 도서들로 이루어진 섬나라인데,
마치 곤충의 유충처럼 구부정하고 기다랗게 뻗어 있는 가장 큰 섬을 혼슈라고 한다.
그 혼슈의 태평양에 면한 북쪽에 센다이가 있는데,
그 센다이 공항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일으킨 2011년 3월의 동일본 대지진 때
우리가 TV를 통해 보았던, 비행기가 쓰나미에 휩쓸려 둥둥 떠 밀려가던 곳이기도 하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필자는 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끝내고 탑승 게이트
가까이에서 활주로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지방 공항이라서 붐비지 않아 좋았다.
그때의 쓰나미로 파괴되어 새로 지은 건물인지라 옛 추억을 더듬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이 그러한 필자의 머릿속으로 들어오셨다.
인생의 온갖 회한이 다 담긴 얼굴이었다. 1981년 초, 공무원 신분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간 필자는 센다이를 거점으로 하여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 만나 뵈었던 분이다.
필자의 업무는 주로 교포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니 교포의 모임에 부름을 받으면 여기저기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서 이야기를 했다. 한번은 신년회 때 이런 내용의 스피치를 하여 청중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산 적이 있다.
‘여자는 여자답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사랑을 받듯이 한국인은 한국인다워야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전적으로 여성의 영역에 속했던 육아를 위해 이제 남자도 휴직을 한다.
여자아이가 공이라도 찰라치면 계집아이가 사내아이처럼 경망스런 짓을 한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제는 축구선수가 된 지소연이나 이민아가
팬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러니 지금은 위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어떻든 필자가 방금 언급한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그 자리에서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정신대 할머니셨다. 지금은 정신대 할머니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그분들의 빼앗겼던 젊은 시절을 같이 아파하며 온정으로 대하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이국땅에 생활의 터를 잡아 같이 살아가는 동족인데도 할머니를 바라보는 교민들의 눈길에는 측은해함에 멸시의 감정도 숨기고 있었다.
그걸 할머니라고 모르시겠는가.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면 눈물을 흘리시는 일이 많았다.


크리스천다움과 성경

할머니에 대한 생각은 탑승한 비행기가 이륙하여 운해 위를 나를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할머니와 한국인다움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100만, 200만이 모인 가운데에서 촛불이 보여 준 그 성숙한 인간다움이 어찌
왜소하게 오므라들어 버린 한 할머니에게는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을 몇 십 년이라는 세월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는 뒤죽박죽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는 가운데 생각은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한국인다움과 인간다움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같다면 어떤 것이 같고 다르다면 또 어떤 것이 다른 것일까.
이때 ‘기독교인다움’이라는 말이 생각들 사이로 슬며시 끼어들었다.
필자는 ‘기독교인다움’은 곧 ‘인간다움’이라고 생각해 왔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인간이 되지 못한 기독교인은 있을 수 없다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그렇다고 인간다우면 다 기독교인다우냐 하면 물론 그럴 순 없다.
‘인간다움’은 ‘기독교인다움’의 필수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답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인간다움’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필자는 그것을 성경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따라 생각하고 성경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되는 것 말이다.
이리 말하면 그럼 성경에 갇혀 살라는 말이냐며 답답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말씀은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한다. 성경은 책 한 권의 좁은 공간이 아니라 창공보다 넓어 자유로운 공간이다.
하나님의 품이 무한하게 넓고 크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하다.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지만 사족이 너무 길어지는 것도 볼품사나운 일이니
그만두고 ‘인간다움’과 ‘기독교인다움’으로부터 이어지는 ‘성경적 사고’로 돌아갈까 한다.
이제 한 주 후면 성탄절이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세상으로 오셨음을
축하하며 기뻐하는 날이다. 하나님이시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살리시려 사람의
아들로 오셨음을 경하하는 날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번 성탄절을 기쁘고 즐겁게 만은 보낼 수 없을 것 같다.
한 주일쯤 전에 본 글 하나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필자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글을 쓰고 있는 인터넷 신문 <당당뉴스>에 올라온
“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라는 칼럼이 그리한 것이다.
그래서 그 글과는 다른 필자의 견해를 여기에 피력하려 한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게 정말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못 믿어서인가

그 글은, ‘부처나 예수님의 출생도 단군을 비롯해서 김알지나 박혁거세 등의
탄생기록과 비슷한 설화 혹은 신화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는 내용으로 말한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하나의 ‘설화’나 ‘신화’로 본 것이다.
그러며 그 같은 탄생 설화를 문자 그대로 믿으라고 가르치니 주견이 뚜렷한 요즘의
젊은이들이 그것을 믿지 못해 교회를 떠난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고는 그들이 수긍할 수 있는
새로운 설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출생이 남달랐기 때문에 그분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위대했기 때문에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로 그분의 위대함을 그렸다”며,
그에 대해 부정하는 견해에는 “신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비행 때문에 교인이 줄어든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교회 침체의 “더 큰 원인은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생각을 파악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도 한다.
필자도 부분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는 주장들이다. 한국 교회가 이 지경이 되도록 침체된
 것은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비행 때문’이라는 말도 그렇다. 그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교회 구성원 모두의, 그러니까 기독교인 전체의 탓이지
일부 지도자들의 탓만은 아니다. 나 자신의 탓이기도 하다.
교회 침체의 원인을,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생각을 파악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보는
견해도 일정부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그다지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쑥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하자면,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知彼知己百戰百勝)이라는 게 있다. 목회자가 교인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은 목회의
필수요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교인들의 욕심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면 안 될 일이다.
한국 교회가 이토록 세속화된 것은 교인들의 잘못된 바람을 채워 주기 위해 기복신앙을
교회로 끌어들인 탓이 크다.
‘교인들은 급속히 변하는 사회에 살면서 다양한 책들을 읽고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있는데, 목사들은 근대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성경 안에 갇혀 있다면’
지도자로서 앞서가는 교인들을 인도할 수 없다고도 하는데, 정말 그런가.
목사들의 독서 양과 폭이 교인들에 미치지 못하는가. 그래서 성경 안에만 갇혀 있는가.
필자는 성경 안에 갇혀 있다는 말 자체에도 동의할 수가 없다. 갇혀 있다면 성경 안이
아니라 성경 아닌 것을 성경으로 잘못 알고 있는 무엇인가의 안일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한다. 책 한 권의 좁은 공간이 아니라 하늘보다도 넓어 마음껏 날 수 있는 공간이다.
‘신학교에서 현대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고 목사들이 보수적인 신학서적뿐 아니라
현대신학 사상이나 인문학에 관한 책들도 읽어야 한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목회자들은 그런 책도 읽어야 한다. 그래야 교인들과 대화가 된다’
고도 말하는데, 말이야 틀리지 않다. 목사들은 일반 교인들보다 더 다양하고 많은 책들을
읽기도 하고 공부도 하여 지적 수준을 높여 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 해석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성경 속으로 끼어들어 그 순수성을 해친다면 안 될 일이다.
필자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설화나 신화로 본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한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을 단군이나 김알지, 박혁거세 등의 탄생기록처럼 설화나
신화적인 이야기와 동류라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는 역사적 존재임과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다

“창세기 1장의 기록을 과학적인 기록이라고 말하거나 그 창조 설화를 문자 그대로
믿으라고 하면 교인들의 마음이 답답해진다”고도 하는데, 필자는 오히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천지창조의 성경 기록을 설화라고 하는 데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물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믿기 쉬운 일은 아니다. 필자도 초신자 시절,
이 문제로 번민한 적이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믿어지면서도,
그러니 그에 비하면 ‘동정녀 탄생’을 믿는 것은 간단하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따라 주지 않아 괴로웠다.
그런데 그때 설화나 신화 운운하며 적당히 지나치고 말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도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하기만 한 크리스천이지만,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하늘나라의 백성이라는 자부심만은 작지 않다. 그에 따라 누리는 기쁨과 행복 또한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글은, “예수님은 역사적 존재가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니다.
“예수님은 역사적 존재임과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시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엔도 슈사쿠는 한 발짝 더 나가 예수님을 사실(史實)의 존재도
사실(事實)의 존재도 아닌 진실(眞實)의 존재라고 말한다. 성경을 읽다 보면 분명 그런
면도 나온다. 필자도 사실은 아니나 진실인 내용의 글을 쓰는 일이 많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사실(史實․事實)을 김알지나
박혁거세 등의 설화와 동일선상에 놓고 보아서는 안 된다.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젊은이들에게 영웅들이나 위대한 인물들의
탄생 설화를 예로 들면서 예수님의 출생도 그런 인물들의 출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
이야기를 빌려서 표현된 것이라고 말해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동정녀 탄생’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성경의 모든 초자연적 현상 또한 그럴 것이다.
그리고 ‘부활’ 역시 설화나 신화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런데 그리된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될까.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성립된다 해도 그것은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한 기독교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에 대해 젊은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가르치는 것,
즉 설화로 가르치는 것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
즉 동정녀 탄생으로 가르치는 것은 교회가 쇠퇴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니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의 말도 하는데, 아니다.
물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사실을 믿지 못하고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면 어떠한 다른 이유로도 교회를 등질 가능성이 크고,
교회에 남아 있다 해도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의 본질과는 다른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방법은 따로 없다, 크리스천다워지는 길밖에

젊은이들은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 “처녀 마리아가 아이를 낳았다고 말하면,
미혼모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리아의 경우 약혼한 요셉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속도위반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는데, ‘동정녀 탄생’이 아니라면 그리 생각할 수
밖에 방법이 없지 않은가.
아니, 아니다.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이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듣고 은밀히
파혼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면 마리아는 약혼한 남자가 있는데도 다른 남자와 성적
관계를 가져 임신까지 했다는 것이 된다. 당시로서는 돌에 맞아 죽을 중죄요, 구역질이
날만큼 부정한 일이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있어야 하고,
성경은 그가 누구인지도 밝혔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출생 과정도 밝히 기록했어야
한다. 그 같은 추잡한 사실을 숨기고 ‘동정녀 탄생’이라는 거룩한 포장을 했다면 성경은
인류를 대상으로 한 희대의 사기를 친 것이 된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 현상들이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믿어진다면 그보다 감사할 일이 없지만, 믿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해도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의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께 자신의 전존재를 맡기고 신앙생활을 해 가다
보면 많은 것들을 체험하게 되고 그럼으로 믿기지 않았던 것들까지도 믿어지게 된다.
아니 특별한 체험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내면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셔
믿어지게 된다. 
교회의 쇠퇴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비유나 설화 또는 신화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기독교인답지 못한 데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적인 사고로 사는 것,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다. 빛 되고, 향기 되고, 소금되어 사는 것이요, 그럼으로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기쁘고 즐겁게 행복을 향유하며 사는 것이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는 입으로만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마음속에 이루어진 하늘나라는
일상의 삶도 하늘나라가 되게 한다.
빛과 향기와 소금은 모두 자기희생을 전제로 하는데, 그런 가운데 이뤄진 하늘나라에서
크리스천들이 모두 즐겁고 행복하게 산다면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가 될 것이다.
한국 교회가, 세계의 교회가 쇠퇴한 가장 큰 이유는 크리스천들이 크리스천답지 못함에
있다. 그러니 누구랄 것도 없이 나 자신부터가 크리스천답게 변화되도록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것만이 나도 살리고 기독교도 부흥케
한다. 세상을 모두 행복하게 한다.

충남대 명예교수 임종석

공주아빠 17-02-18 20:16
 
저는 예수님이 저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을 믿습니다.
크리스천 다워지는 길이 무엇인지를 항시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훈훈 17-02-18 22:06
 
저 또한 크리스천 인으로써 크리스천 답게 변화하고 노력하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명탐정레옹 17-02-22 15:35
 
잘못된 교회들을 바로잡아 정직하고, 올바른 교회가 운영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봄날 17-02-25 15:50
 
크리스천들이 크리스천답지 못함에 있다.....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지뇽 17-03-02 22:20
 
크리스천 다운 ...크리스천 답게 살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빗방울 17-03-03 23:42
 
말로는 크리스천 인이라고 하지만 행동은 세상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크리스천인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제가 되기를  노력하며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