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9-12 10:51
기독교의 조상제사 논란-당장 올 추석 차례는 어찌할 것인가 - 충남대 명예교수 임종석
 글쓴이 : 안타레스
조회 : 2,466  
보본(報本)보다 강복(降福)에 방점이 찍힌 게 제사의 현실이다

한국 기독교에 있어서 조상제사문제는 오랜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그럼에도 언제 끝날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단순한 논란이라면 크게 개의할 것이 없겠으나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 논란이라는 게 제사에 대한 찬반을 놓고 벌이는 것인데,
그것은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양쪽이 다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가치로 조상에 대한
효(孝)와 신앙(信仰)에 대한 것이기에 충돌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가족 공동체, 또는 혈연 공동체 안에서의 일이다 보니 가정은 불화를 면치 못하고
혈연에는 금이 가 두 쪽으로 갈라져 있다.
혹자는 교회가 적절한 지침을 제시해 주지 않고 교리적으로만 다그치는 바람에
신‧불신 간에 갈등을 키운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기독교인에 있어서의 제사는 신앙상의 양심 문제이다.
지침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리적으로만’ 운운하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어느 교파가 됐건 교리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에는 자기네가 걸어온 인간 냄새나는 발걸음의 흔적이 적잖게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교회들이 말하는 제사에 대한 권면은 교리보다 성경을 근거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게 바른 것은 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이기 때문이다.
본질을 포함한 기독교의 모든 것은 성경만이 규정할 수 있다. 어떠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천사의 말일지라도 성경에 위배되면 버려야 한다.
제사라고 다르지 않다. 성경과 그 정신에 맞으면 장려해야 하지만, 맞지 않으면 버려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이다.
양보나 절충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할 것이 있고 그래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물질이라든가 명예나 지위 같은 육적인 것이라면 절충의 묘를 살려 합의를 끌어내고,
많이 양보하는 쪽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만,
영생의 길로 이끄는 신앙의 문제는 한 치의 양보도 절충도 해선 안 된다.
이리 말하면 무조건 반대만 해서는 안 된다고들 하는데, 무조건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보다 더 확실한 조건이 없다.
그렇다면 조상제사는 어떤가. 성경과 그 정신에 맞는가.
먼저 제사에 대해 대충이나마 살펴보는 것이 수순일 것 같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근본을 잊지 않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가리켜
 보본(報本)이라 하는데, 그 보본의 마음으로 사후에도 살아생전처럼 부모님이나 조상님들을
정성껏 섬김으로 효성을 나타내는 것이 제사이다. 그리고 그렇게 제사를 지낼 때
혼백이 오셔서 진설된 음식을 잡수시고(歆饗), 그 결과로 복을 내려 주신다(降福)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보본보다 강복에 방점이 찍히는 게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제사의 보편적 현실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자손들에게 복을 주기도 하고 화를 입히기도 하고,
또는 원수를 갚기도 한다. 그러므로 조상신을 잘 모셔야 집안이 화를 면할 뿐 아니라
형통해진다. 묘 자리를 좋은 곳에 잡아야 하고 제사도 정성껏 지내야 한다.
제사란 이와 같은 것인데, 어떤가. 성경과 부합하는가. 직접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면
성경정신에 맞는 면이 있기는 한가.

천사들은 이슬을 먹고 사는가, 음식을 먹고 사는가

물론 이것저것 다 제처 두고 ‘효(孝)’의 정신만을 놓고 본다면 제사도 기독교 신앙과 크게는
다르지 않다. 부모공경은 기독교에서도 유교 못지않게 소중한 가치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효행은 살아 있는 분들께만 할 수 있다.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신 후에는 할 수가 없다.
사후에도 부모님과 조상님들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분들을 살아생전처럼 정성껏 섬길 수
 있다면야 그에 대해 누군들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사람이 죽어 일단 저세상으로 가면 다시는 이 세상으로 올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둘 다 죽어 부자는 음부로 떨어지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는데,
고통을 견디다 못한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때 아브라함이 뭐라 했는가.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 올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16:26)
하물며 사후의 영혼이 저승과 이승을 넘나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귀신을 봤다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사람이 죽어 된 영적 존재가 아니다.
천사가 타락한 사단의 수하인데, 그게 사람이 죽어 된 혼령처럼 가장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이 그러한데 제상은 왜 차리며 절은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그게 과연 성경에 따르는 것이며 기독교적인 것인가.
음식은 생전의 사람들이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나 천사와 같이 되어서는 전혀 필요치 않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신 적이 있지 않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이는 경우가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영양분을 공급받기 위해 잡수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육신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였다.
제사 때의 절(拜)도 이치에 맞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절은 인격체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직접 정감을 느낄 수 있는 눈앞에서 다른 인격체에게 몸을
굽힘으로 하는 인사이다.
일본인들은 자기네의 왕을 현인신(現人神)라 하여, 그가 사는 동쪽의 궁성을 향해 절을 했는데,
소위 동방요배(東方遙拜)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일제 36년의 그 불행했던 세월에는 그들이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까지 그걸 강요했다.
우리는 물론 거부했고, 특히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이니 할 수 없다며 죽음으로 항거했다.
이런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럼 조상을 기리어 제사 때 절을 하는 것도 그 같은
우상숭배냐며 따지려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조상에게 하는 절이 아니라 제상을 앞에 두고 그것에게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람이 죽으면 저 세상(천국 또는 지옥)에 가게 되는데,
거기는 일단 가게 되면 다시 이 세상으로 올 수가 없다.
부모님이 됐건 조상님이 됐건 사후에 일단 하늘나라에 가시게 되면 그분들을 위해 자손들이
직접적으로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자손들이 그분들의 의식주나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도 걱정할 것이 전혀 없다.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자신의 신앙을 매일같이 돌아다보며 아름다운 삶을
엮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들께 욕이 돌아가는 일이 없이 누구누구의 자녀,
또는 손자손녀가 본받을 만 하다고 칭찬을 받는 것이다.
“부모님께서 살아 계신 자녀들이여, 돌아가신 뒤 제사를 잘 지내려 하지 말고 살아생전에
효도하세요. 돌아가시면 해 드리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미 돌아가셨다면 그대는 때를 놓쳤습니다. 제사로 효도의 흉내를 내는 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할 뿐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효도를 받을 수 있도록 자식들을
신앙으로 잘 양육하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사람이지만, 필자더러 혹 독자여러분께 효도에 대해 한 마디 하라면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제사가 효도라면 해마다 기일을 지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지내라

기독교가 이 땅에 처음 들어오자 많은 난관에 봉착했고,
그중에서도 제사로 인한 박해는 실로 큰 것이었다. 수많은 생명들이 희생되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있는 모양이다. 정면으로 대립하지 않고 지혜롭게,
신축성 있게 대처 했더라면 그 귀한 목숨들이 희생되지 않고도 끝났을 거라는 것이다.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신앙도 옛날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신학도,
교리나 성경 해석도 달라져야 한다고 한다.
100년 전의 그것들과 같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미니스커트가 보편화 된 세상에 쓰개치마를 고집해서는 안 되고,
머리를 맞대고 토론에 열중하는 남녀 대학생들을 보고 남녀칠세부동석을 말하면
 웃음거리가 된다.
선교초기에 ㄱ자 예배당이 오늘의 교회 건물로 발전했다.
이처럼 신학도 교리도 성경해석도 모두가 발전해 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다고 다 발전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후퇴하는 것도 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길을 걷다 보면 앞으로 나간다는 것이 되레 뒤로 후퇴하게 되는 일도 많다.
그래서 나침반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이 무엇인가.
크리스천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 아닌가.
신앙 상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갈 길을 밝히 보여 주는 나침반인 성경에 비춰 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신앙의 선배들이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지켜 왔던 바른 길을 버리는
후퇴를 하면서도 진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결과를 낳는다.
거듭 말하지만 성경은 살아 계신 부모님께의 효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사후의 부모님께 대해서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 없다.
제사의 당위성을 말하려거든 그 성경적 근거부터 제시하는 것이 옳다.
기독교인도 자손대대로 전해 내려온 미풍양속인 제사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성경적 근거를 대는 일 없이 목소리부터 높이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에서 우리 한 번 다 같이 생각해 보자. 유교식 제사가 정말 부모님을 포함한 조상님들께
효도하는 미풍양속인가. 정말 그렇다면 왜 세월이 흐를수록 축소 일변도로 되어 가고 있는가.
옛날에는 부모가 세상을 뜨면 삼년상을 치렀고,
그러는 사이에 살림살이가 휘청거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제 그 삼년상이라는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조상 한 분 한 분마다 5대조까지 매년 지내던 제사도 이제 한두 번으로 모아 지내게 되었다.
제사가 효도요 미풍양속이라면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고, 미풍양속을 해친 것도 된다.
그런데도 그런 그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기독교인들을 비난을 한다면
그게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 아니고 뭐겠는가.

사람의 생사화복은 조상 아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가족의 화목을 위해서 제사에 대한 의식을 한국기독교의 상황에 맞게
정착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제사 문제에 대해 신축성 있게
접근하여 절충함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도 한다.
성경이 그리하라 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화목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10:3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뜻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고 털을 가시처럼 곤두세우는 고슴도치처럼 가시 돋친 신경으로 상대방을 아프게
찌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넉넉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감싸 안아 화목을 도모하되,
생명을 위한 진리가 훼손 받을 때는 설령 불화를 부른다 해도 한 치의 양보조차 하는 일 없이
자신을 지키라는 말이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말만 많고 실천은 더디게 하며,
따지기를 좋아하고 손해는 죽어도 보기 싫어한다는 말을 듣는다.
슬픈 일이지만 거짓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원만하고 넉넉한 마음이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손해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구보다도 먼저 일가친척을 비롯한
이웃에게부터 그리해야 한다. 그리한다면 제사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불화나
반목으로까지는 치닫지 않고 끝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기독교의 상황에 맞게’ 운운하는 말도 그렇다.
그 ‘상황’이라는 것이 성경에 부합하면 받아들여도 좋지만,
부합하지 않으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버려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제사 문제로 인한 마찰 때문에 개신교인들이 천주교로 옮겨 가고 있다며,
옮겨 간 후로는 제사 문제로 다투는 일이 없어져 가족 간의 화목을 이루었다는 사례까지
소개한다. 그러니 교인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제사의례를 존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인 이탈을 막기 위해, 또는 교인을 모으기 위해 기독교의 소중한 가치를 이것저것 다 내어
준다면 종래에는 무엇이 남겼는가.
그런 이유로 교회를 떠날 사람이라면 다른 이유로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기독교다울 때 빛을 발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융성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제사를 통해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는 의식이 제사를 지내는 자손들에게
다분히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환언하면 조상들이 복을 주는 하나님의 위치에 있어 경배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 된다.
어떤가. 사실이 이런데도 제사를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조상신이 아닌 사단의 수하 잡신을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려놓고 절을 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말인가.
이를 두고 조상을 공경하는 건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말은 이제 그만두기 바란다.
조상을 공경하는 걸 우상숭배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오실 수도 없는 조상의 혼령을 위한답시고
음식을 차려 놓은 제상에 절을 하는 제사가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충남대 명예교수 및 우리집공동체 원로목사 임종석

가츠 16-09-15 14:31
 
제사는 효심의 상징이지만..
점점 세월이 바뀜에 따라서.. 현재의 부모님에게 잘하는 게 좋은 거 같기도 하네요.
참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있을 꺼라 생각됩니다.
홍석태 16-09-17 16:15
 
효심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 보다는 타인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혹은 그 아래의 자식들에게 효도를 강요하는 면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니 우리는 깨어서 전진하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빗방울 16-09-24 22:13
 
보본보다 강복을 더욱 원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저희가 되어버렸네요
그러면서 조상신이 아닌 사단의 수하잡신에게 저희도 모르게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았네요
들꽃 16-09-28 18:49
 
저도 맏이로 매번 제사를 드리는 입장에서 매우 공감가는 말씀입니다.
부모공경은 기독교에서도 유교 못지않게 소중한 가치임에 동의하지만 직접적인 효행은 살아 있는 분들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피아 16-09-29 09:04
 
살아 계신 부모님께 효도 하는것이 당연하고  돌아가신 뒤 제사를 잘 지내려 하지 말고 살아생전에 효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봄날 16-10-02 10:23
 
기독교 성경의 십계명에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첫번째로 적혀져있지요.
그리고 두번째로 형상을 만들거나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아버지되시는 그 분 한 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뇽 16-10-03 21:33
 
돌아가신뒤 제사를 잘지내려 하지 말고 살아계시는 부모님께 더더욱 효도하는 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명탐정레옹 16-10-04 13:59
 
저도 부모님께 더욱 더 효도해야겠네요.
행복가득 16-10-04 14:17
 
살아있는 부모님께 안아주며 "사랑합니다"라고 해 보셨나요?
먼저 안아주는 우리의 모습이었으면 좋겠지요
하닷사 16-10-05 18:55
 
나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며 살아계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자가 되기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말씀입니다.
훈훈 16-10-06 17:51
 
항상 마음만 있지만 곁에 계신것의 대한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지금 옆에 계실 때 더욱 더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갖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새미로 16-10-06 18:24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모두 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기적의삶 16-10-06 18:29
 
영생의 길로 이끄는 신앙의 문제는
한 치의 양보도 절충도 해서는 안되다는 말이
가장 와닿습니다.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을 살기 위해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해야겠습니다.
박로순 16-10-06 18:31
 
살아계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참된 효임을
조상께 제사를 드리고 공경하는 것은
우상숭배임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