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작과 졸작의 접점에서

제주 서귀포의 표선해수욕장은 물도 맑고 그 빛, 색조가 아름다워 서너 번이나 다녀왔지만, 일출은 본 적이 없기에 카메라를 들고 나섰습니다. 지난달(10월) 20일이었으니 제주도 일출시간이 새벽 6시 43분, 집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걸리므로 알맞은 시간에 도착하려 4시 조금 넘어 일어나서 5시쯤 출발하였습니다.

어두운 시간이다 보니 조심 운전으로 도착하여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삼각대에 카메라를 장착하려 가방을 열어보니, 아풀사, 렌즈만 두 개 들어 있고 정작 중요한 카메라가 없지 뭡니까. 장가가는 사람이 뭐를 떼어놓고 간 격이지요.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일출을 보려고 이곳 해수욕장에 오는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해변으로 가보니 아니 이건 또 뭔가, 일출을 볼 수 있는 지점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간조시간 전이라서 모래사장을 크게 돌아 멀리 보이는 건너편 일출을 볼 수 있는 지점으로 가보았습니다. 가기 전의 그곳은 앞이 탁 트인 바다가 아니라 U자를 오른쪽으로 ㄷ자처럼 옆으로 누여 놓은 모양이라서 트인 건 오른쪽으로 옆이었던 것입니다. 힘은 들었지만, 가 보니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고, 일출 장소로서도 제격이었습니다.

카메라가 없으니 핸드폰으로라도 찍어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어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바다의 일출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고 핸드폰이다 보니 흥도 나지 않아 몇 장 찍다 그만 두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가 아니라 아침에 집에서 하는데, 일출이나 아침 사진을 찍으러 나갈 때면 그럴 수 없으니 찍고 나서 늦더라도 차에서 기도를 합니다. 차 안의 기도, 참 편하고 좋습니다. 기도의 골방으로 그만한 곳도 없지요. 한적한 곳이면 금상첨화고요. 건너편의 주차장보다는 이쪽이 좋을 것 같아 주위를 살펴보니 마침 호젖한 데다가 차를 세워두기도 알맞은 곳이 있어 모래사장을 지나 주차장으로 갔습니다. 물이 많이 빠져 올 때보다 훨씬 가깝게 갈 수가 있었습니다.

차를 가지고 와 해를 등지게끔 세워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도중에 볼일이 보고 싶어 나와서는 사람들 눈이 안 닿는 곳에서 실례를 했습니다. 그런데 모래밭의 바다가 손짓을 하여 불렀습니다. 기도는 걸으며 바다를 좀 보다가 와서 이어 하기로 하고 모래밭의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자기도 모르게 ‘와!’도 아니고 ‘아!’도 아닌 무언가의 아름다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자연에서의 가장 큰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내 나라가 아닌 일본 땅에서 보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이라고 하는데 일본 또한 비가 많아 물이 많고 나무 울창하여 아름다운 경치가 많거든요.

벌써 40년이 넘은 오래전의 일이 됐는데, 공무로 인한 일본 체재 때였습니다. 일행 몇과 함께 홋카이도(北海道) 구시로(釧路)에 갔을 때 만났던 아칸코(阿寒湖)는 지금도 어제 일인 것처럼 눈에 선합니다. 우리 일행은 아침에 관광선을 탓습니다. 배가 호수에 우거진 숲을 지나는데, 햇빛이 비쳐 들었습니다. 찬란한 햇살, 그에 반짝이며 아롱지는 단풍 고운 나뭇잎, 물결치는 수면의 빛… 그것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날 오후 우리 일행은 마슈코(摩周湖)를 보러 갔습니다. 산상 호수로 투명도 높고 안개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저의 일행이 갔을 때는 한없이 푸른 하늘에 구름 떼들이 조금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침 한가을이어서 단풍이 아름다웠습니다. 우리나라의 붉은 단풍이 아니라 은은하게 노란빛을 띤 부드러운 단풍이었습니다. 구름이 지날 때면 그 빛이 엷어졌다 짙어졌다를 반복했습니다. 수면은 수면대로 영롱하게 변해 갔습니다. 그것들의 조화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뤘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일본인 여성 관강객들의 탄성이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아름다운 경치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열흘쯤 전 표선해수욕장에서의 체험은 그때의 감동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너무너무 아름다워 감탄조차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그 속을 거닐 뿐이었습니다. 조물주 하나님의 숨결 어린 그 손길에 쌓여 역시 그분이 만든 것치고는 지극히 작고 못생겼으나 감성만은 살아 있어 그 감성이 그 분 조물주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황홀감에 자신도 모르게 눈이 촉촉이 젖어 들었습니다. 사실을 말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그때의 그 아름다운 광경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조물주의 숨결 어린 손길에 쌓여 그분을 만난 감성의 그 황홀한 여운만이 느껴질 뿐입니다. 40년 전의 기억은 이토록 생생한데 불과 열흘 정도 전의 일인데도 생각나지 않다니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사실을 말하면 열흘 전이 아니라 모래밭을 나오자 마자 실제의 풍광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불가사의라 할 수밖에요.

그러나 저는 그게 아쉽지도 억지로 생각해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조물주 하나님의 걸작 아름다운 자연과 그분의 졸작 저의 감성이 만나는 그 접점에서 안겼던 그분의 품이 준 그 형언할 수조차 없는 은총의 감각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카메라를 잊고 와서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조금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건 의식에 있지조차 않았습니다. 오히려 잊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훨씬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은총의 시간을 마치고 차로 돌아와 이어 드리는 기도 또한 은혜 그 자체였습니다. 기도 때면 그때그때의 기분을 성령님의 역사로 여겨 하나님과의 만남에 영향을 줄까 봐 조심하는 편이지만, 그때는 어때도 좋았습니다. 그냥 마음껏 그분과 함께 기뻐하고 싶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날씨를 보아 다음에는 카메라를 잊지 않고 다시 한번 가야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사진보다는 그날의 그 감격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어서인지도 모릅니다. 감성이 만났던 조물주 여호와 하나님과의 재회, 그리고 그 뒤에 하는 기도의 은혜,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스스로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고난도 유익이라


그 은혜의 날로부터 나흘 후, 24일 새벽 미명에 기대를 한껏 부풀리며 그곳 표선해수욕장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러나 기대는 여지없이 깨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바람이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세찼습니다. 출발 때부터 좀 아팠던 배가 더 아팠습니다. 두텁다싶을 정도로 따뜻하게 입고 나왔는데도 추위가 몸속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물때를 확인하고 왔는데도 바닷물조차 생각과는 달리 빠지지 않은 만조 상태였습니다. 설상가상에 또 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만둘 제가 아니었습니다.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을 밀며 물이 빠지고 있는 모래밭을 크게 돌아 바다로 나갔습니다. 말이 바다지 경사가 거의 느껴지지 않은 곳이라서 모래밭에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지 어떤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물이 그만큼 맑았습니다. 그와는 상관없이 배는 더욱 아팠습니다.

그에다 바닷물을 찍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습니다. 보통의 경치는 일출 직후의 역광이나 측광 사진이 좋지만, 그 시간대의 그런 바닷물 사진은 햇빛이 물에 반사되어 좋지 않습니다. 해가 좀 더 높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로 가서 기도를 하면 될 일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세찬 바람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배가 너무도 아파 바람을 밀고 차까지 갈 엄두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백사장 옆을 지나는 도로 가의 조금은 넓은 공간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관광객들이 바다를 보며 쉴 수 있는 공간이 해변의 도로 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원통 모양의 대리석 의자가 몇 개 있기는 했지만, 거센 바람 때문에 거기에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이 아니더라도 그에 앉아 장시간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등받이로 하여 역시 대리석의 차디 찬 바닥에 바람을 등지고 앉았습니다.

엉덩이는 차갑고, 배는 아프고, 바람은 세차고… 후드 달린 점퍼가 아닌 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습니다. 최악의 환경이었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면 빼 놓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 부부가 하루 두 번 하는 기도를, 어떤 일이 있어도 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지 않게 해 주시라는 것과, 어떤 환경에서일지라도 깊은 골방에서의 기도가 되게 해주시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저는 지금이 바로 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좀 과장하면 사투였습니다. 복통과의 싸움, 추위와의 싸움, 바람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가끔씩 가까이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누구도 기도하는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니까요. 카메라가 옆에 있으니 아마 한 노인이 사진을 찍다가 쉬고 있는 것쯤으로 생각하겠지요. 안다 해도 안 될 것은 없지만, 광신자라고 오해를 받는다면 그렇지 않아도 기독교가 비난을 받는 세상인데,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많이 흘러 기도가 거의 끝나갈 무렵 끊기 적당한 데에서 일단 마치고 모래밭의 바다로 나갔습니다. 물이 많이 빠졌으나 역시 상당히 긴 거리의 모래밭이 물이 빠졌는지 아닌지 분간되지 않았습니다. 해는 알맞을 만큼 떠올라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는 여전히 아프고 바람 또한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습니다. 아예 바지가랑이까지 젖을 생각으로 첨벙첨벙 모래밭 바다로 나가며 찍었습니다. 역시 표선해수욕장이다 싶었습니다. 거센 바람에 연출되는 햇살의 바다는 느낌부터가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느낀 건 머리뿐, 가슴은 아니었습니다. 머리는 좋다, 좋다, 정말 좋다를 연발하는데, 가슴은 거센 바람 속의 복통으로 인해 머리가 만끽하고 있는 좋음을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가운데에서도 표선해수욕장이라는 걸작을 창작하시고 저라고 하는 졸작도 만드신 하나님의 품은 여전히 부드럽고 따스하게 느껴지니 모를 일이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감사와 기쁨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특이한 체험이었습니다.
찍을 만큼 찍고 차로 돌아와 하던 기도를 이어 마저 하고 돌아왔습니다. 집에 거의 다 오니 아프던 배가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표선해수욕장과의 만남이 저에게 신앙의 또 다른 시계(視界)를 열어 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이번 체험은 어쩐지 제 여생의 추억이 되어 자신의 빈약한 믿음을 부요로 포근하게 감싸 줄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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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이태원 핼로윈 참사로 희생된 젊음을 애도하며, 그 유족들께 통절한 마음으로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주시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