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6-07 20:45
사람을 위하여 - 전 침신대 신약학교수 권종선
 글쓴이 : 별빛
조회 : 2,960  
사람을 위하여

(막2:23-28)
얼마 전에 Internet에서 예수님을 반박하는 글들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 글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Internet에 올려놓은 것인데, 그 제목은 ‘Why Jesus?’(왜 예수인가?, 즉 왜 예수를 믿어야 하나?) 또, ‘Jesus Was a Hypocrite’(예수는 위선자) 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글의 내용은 주목할 만큼 전문적이거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러한 성품을 가진 분도 아니었고, 자신이 가르치신 말씀대로 살지도 않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예를 들어, 예수께서는마태복음 5:22에서 “형제에게 . . .
미련한 놈(mwre)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선언하시는데, 같은 마태복음 23:17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사람들에게, 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우맹 즉 ‘미련한 놈들’(mwroi)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는 헬라어 원어상으로는 바보를 가리키는 ‘모로이’(mwroi)라고 하는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예수는 스스로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말씀을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화를 내신 장면이나,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 진저 . . .”라고 하신 것이나,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신 것 등은, “형제에게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마태복음 5:22의 예수 자신의 말씀에 위배되고 있으며,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6)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41)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42)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예수는겸손한 분이 아니고 교만한 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따라야 하는 모범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사람들의 별로 중요치 않은 말들에 대해 반박하거나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그들의 말의 내용보다도, 왜 이런 식의 생각이 가능할까 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이 있었는데 . . , 물론 그들이 근본적으로 예수를 반박하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는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지나치게 획일적으로 수동적인 예수의 모습으로 가르쳐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겸손이나, 온유, 사랑 등으로 대표되는 수동적인 예수상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그와 다른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은 아주 다양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를 본받는 삶, 예수를 닮는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를 본받는 삶, 예수를 닮는 삶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은 겸손, 온유, 봉사, 희생으로 대표되는 삶과 진실,용기, 도전, 개혁으로 대표되는 삶 중 어느 것이 더 예수님적이라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삶을 두 가지 방법으로 대조해서 비교하는 것이 물론 문제가 있지만, 여러분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아마도 전자로 대표되는 삶 속에서 예수의 모습을 더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두가지 모습 중 어느 것이 더 또는 덜 예수적이라든지, 어느 것이 예수적이고 어느 것이 그렇지 않든지 하는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겸손’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예수상은 주로 빌립보서 2장5절 이하에 있는 바울의 권면 즉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 .”로 시작되는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겸손한 분이셨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통해서 나타나는 예수님은 단순히 겸손하고 온유하신 모습으로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좀 더 사실대로 말한다면, 그러한 모습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겸손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그런 모습보다는 다른 모습으로 제시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여러분들이 아는 구절인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13:4-17)을 제외한다면, 사실 4복음서에서 겸손을 대표할 수 있는 사건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전체적인 예수의 모습은 그보다는 적극적이고 과감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선포’하시는 일로 시작해서, 많은 귀신들을 ‘꾸짖어’ 내쫓으시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며,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심한 말을 하시고, 더구나 마태복음 23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혹독한 책망을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잘못할 때에, ‘책망하시고’, ‘분히 여겼다’(막10:14)는 말씀도 있고, 베드로에게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막8:17-18)는 말씀을 하기도 하십니다. 즉 필요에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온유하지 않은 적극적인 성격을 보이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특히 주목해 보아야 할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복음서에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이것이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몇 가지 되지 않는 사건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E. P. Sanders라는 유명한 예수연구 학자는 바로 이 사건에서부터 역사적 예수연구를 시작합니다. 즉 이 사건이 예수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핵심적인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Jesus and Judaism, 1985). 이 사건의 내용을 여러분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11:15). 일종의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신 전혀 온유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Sanders는 이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는 ‘성전 회복을 의도한 예언자’라는 견해를 주장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사건을 볼 때에 예수는 단순한 온유의 화신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온유한 예수상에 기여한 또 하나의 익숙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 것은 사도행전 8:32의 말씀으로서 이사야 53:7에서 인용한 말씀인데,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라는 구절입니다.

즉 순순히 끌려가서 잠잠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역시 복음서는 전체적으로 그런 모습의 예수를 그리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유대교 지도자들이 파송한 하속들이 예수를 체포하러 왔을 때에, 예수는 양처럼 순순히 끌려가거나 침묵하지 않고, 강하게 대꾸합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막 14: 48). 심문 받으실 때에도 예수는 잠잠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않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1-62).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네 말이 옳도다”(막 15:2). 예수는 당당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 편도 돌려대라”(마 5:39)고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8:19이하에서, 대제사장이 예수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강하게 반항적 어조로 대답하십니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20-21절). 이 말을 듣고 아랫사람하나가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반항적으로) 대답하느냐?”라고 하면서 손으로 예수를 쳤다고 기록되었습니다(22절). 예수님은 그대로 참거나 다른 뺨도 치라고 돌려대지 않으시고, “내가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23절)고 대항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성경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분명하게 부각되는 예수님의 모습은 단순히 온유하고 겸손한 양이 아니라, 당당하고 용감한 예언자 같고, 왕 같은 모습입니다. 저는 우리가 가진 일반적인 소극적인 예수상, 예수 닮기는 성경적으로 볼 때에 아주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우리의 예수상과 예수 닮기는 성경적으로 재 정의되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 아니라 어떤 성격이나 모습도 나타낼 수 있는 분입니다. 그 분에게는 용기와 분노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해도 예수님은 분명히 일관된 분이고, 그 일관성에는 어떤 변치 않는 원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로 하여금 온건하건 과격하건 간에 어떤 말씀이나 행동을 하게 한 동기가 있다면, 여러분들이 쉽게 알 수 있는 대로, 그것은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친히 가르치신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사신 것이 분명합니다. 수많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충돌해야 했고,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율법이나 성전과도 충돌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율법과 또한 율법을 지지하는 바리새인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미 읽은 바와 같이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가다가 밀이삭을 자른 일이 문제가 되어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 문제를 따지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읽지 못하였느냐? 라고 반문하시면서, 구약 성경의 권위로써 또 유대인들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의 실례를 들어서,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써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하십니다. ‘성경’에서 ‘다윗’도 자신과 또 함께 한 사람들을 위해서 성전에 들어가서 대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지 않았느냐? 고 또 한 번 반문하시면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 하셨습니다(막2:27).

그리고 예수 자신은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자신은 율법보다 더 우위에 있으며, 특히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자신은 주인으로서 안식일 지키는 일을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외견으로 볼 때에, 이 사건은 우선 세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고, 안식일과 관련된 예수님과 바리새인 간의 논쟁이 복음서에서 6번이나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또한 안식일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율법 중 하나라고 할 수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즉 본문의 안식일 논쟁은 결국 율법 전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구약학자이건 신약학자이건 간에 제가 아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안식일”은 원래부터 “사람들의 안식 또는 휴식”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런 다른 요구 없이 사람들과 육축까지도 절대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는 안식일 법은 절대적인 안식과 휴식, 그리고 평안의 법이었습니다. 그 것은 처음부터 ‘사람을 위하여’ 제정된 법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또는 후대에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39가지 세부규정을 정해 놓았고, 미쉬나(Mishna)의 한 기록에는 이 39가지의 규정 밑에 다시 각 각 6가지의 규정들을 만들어서, 즉 234가지의 규정을 만들어 지켰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시다시피 그들은 규정을 정해서 엄격하게 안식일을 준수하려는데 아주 열심이었지만, 결국 안식일의 근본정신인 참 ‘안식’(rest)에는 소홀히 했고 또 근본적으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제정된 것이었다는 점을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 하시고 또 성전의 파괴를 선언하신 것도 성전이 사람들로 하여금 참 기도와 예배의 장소로써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참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처소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 위에서 사람을 지배하는 제사와 제도로 전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순교하기 전에 한, 긴 설교에서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었지만,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행 7:48)고 말을 했고,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역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신다”(행 17:24)고 말했습니다.
결국 성전은 하나님의 장소라기보다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을 위한” 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대표인 안식일, 제사의 대표인 성전, 이 모두가 ‘사람을 위하여’ 있어야 하는 중심을 잃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 것들과 충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궁극적 관심은 율법이나, 제사, 제도, 규정, 원리 등에 있지 않고 바로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제가 ‘사람’이란 단어나 ‘사람을 위하여’라고 하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강조하는 것을 보고, “당신은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 조금 잘못된 것이 아니냐?” 이렇게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선, ‘사람을 위하여’라는 문구나 ‘만민의 기도하는 집’ 이란 표현은 원래 제 표현이 아니라 예수께서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위한다’라는 말이 ‘하나님을 위한다’라는 말의 반대말로 생각하거나, 이 둘을 전혀 다른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물론, 그리고 당연히 우리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은 하나님이며, 그분의 생각과 뜻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그 뜻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보이는 관심에 같은 관심을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우리, 사람들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질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람들도 동일한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 동전, 아들의 비유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풍성한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하는 일은 바로 그분의 뜻대로 사람들을 위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기독교는 ‘Humanism’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 중심적, 즉 ‘신본주의적’ Humanism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관심을 보이시고 또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기 때문에 사람과 그들의 삶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합니까? 사랑한다고 하는 고백을 거듭함으로써 표현합니까? 하나님께만 관심보이고 모든 시간을 그분에게 예배하면 됩니까? 하나님 자신에게 물질을 드립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구약의 계명을 강조 하셨습니다(마22:37, 막12:30, 33, 눅 10:27).

신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이나 명령은 복음서에만 나타나고 있고, 복음서에서도 대단히 많이 나올 것 같지만, 사실은 4번 밖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간접적 표현, 6회 눅11:42, 요 5:42,롬8:28, 고전8:3, 요일4:21, 5:2).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4번의 명령은 언제나 웃 사랑 명령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에 대한 명령이 단독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단독으로 5번이 더 나타나고 고(마5:43, 19:19, 롬13:9-10, 갈5:14, 약2:8), 형제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9번이 나타나고, 서로 사랑에 관련된 구절은 18개나 됩니다. 이러한 통계적 수치가 하나님 사랑보다 이웃이나 형제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 사랑은 항상 이웃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구체화되며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들에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 ” "너희도 나를 사랑하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요 13:34).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하나님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1).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55: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깨닫고 느끼고,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이웃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해야 하고, 구체적인 행함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신약의 정신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있다면, 하나님의 관심과 뜻은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을 위해야 하고, 그들의 삶에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께서 본을 보이신 삶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한 장소에서 건물을 짓고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몸소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을 위해 어떤 율법규정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미 있는 규정들도,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만 했으며, 그렇지 않을 때는 의미 없는 것이 될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과 전통에 충실한 바리새인들이 율법과 전통을 사람들의 삶을 올바르고 풍요롭게 해 주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교적 엘리트주의에 빠지고, 자기의(義)를 내 세우며, 자만하며,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며 구분할 때에,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더군다나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하나님에게만 관심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율법이나 규정을 지켜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사람을 위해서 그것을 위반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안식일 율법이 지켜져야 한다고 예수께 도전했고 예수는 오히려 사람을 위해서 그것이 위반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원래부터 율법이나 규정이나 신앙 Program이나 신앙 원리들은 사람들이 신앙의 삶을 잘 사는데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율법이나 규정, Program, principle 등은 시간이 지나면 사람을 그 밑에 사로잡는 속성이 있습니다. 항상 의식적으로 조심하지 않는다면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이러한 ‘초등학문’(초보적 신앙)의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초등학문에 종노릇 하는 삶을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 아니라고 하며, 예수와도 상관이 없는 삶이라고 책망합니다(갈5:4).

사실 제도나 율법 중심의 삶은 사람들을 편하게 생각하도록 해 주기도 합니다. 규정과 제도 중심의 삶, Program 중심의 삶은 익숙해지기까지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안에 들어와 있는 한, 안정감이 있고, 익숙해지면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삶이나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할 때에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평가기준이 생겨서 편리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주장하고 요구하는 지도자들에게도 편리한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사람들을 control하기 쉽고, 또 앞서 말한 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기도 쉽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사실상 많은 지도자들은 규정과 제도 중심, program과 principle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성전의 제사제도를 지킴으로써 그 속에서 안정감을 갖게 되면서부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을 상실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율법과 규례를 철저히 지킴으로써 그 것에 익숙해짐으로써 자신들은 안정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구별했습니다.

우리도 어떤 규정이나 program을 계속적으로 지킬 때에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일종의 안정감 또는 만족감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과 삶의 참된 풍요로움을 분별해야만 합니다. 이것들과 참 신앙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오해하지 않아야 할것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규정, 제도, program, principle은 모두 근본적으로 신앙의 삶을위해 생겨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성격상 이러한 것들을 따라 갈 때에, 익숙해 질 때에, 종종 그것은 신앙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위치를 넘어서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항상 이러한 모든 것이 언제나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이것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회를 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전도를 하든지 아니면 가르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합니다. 물론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예수님의 고난을 말렸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도리어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목회를 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행정을 하거나 가르치려면 정말 그 사람들의 풍성한 삶을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자신을 따르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때에 일종의 자기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지 진실하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그 사람들의 삶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지 확인 해 보아야 합니다. 전도를 왜
해야합니까?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명령을 지켜야만 하기 때문에, 명령을 지킬 때에 좋기 때문에 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명령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지 사람들을 기독교인 만드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입니까? 즉 하나님의 생각과 관심이 우리들이 명령을 지키는가 안 지키는가 하는데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들도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데 있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전도하는 행위 자체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사람과 그 사람의 삶에 있습니다. 사람을 위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하지 않은 목회, 행정, 교수 및 모든 하나님의 일은 오히려 사람의 일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풍성한 삶에 관심을 보이고 그것을 돕는 것은, 실제로 자신이 그러한 풍성한 삶은 사는 사람들이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자신이 먼저 제도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주님께 대한 자발적인 헌신으로, 자격 없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사람들을 그 사람의 성별이나 빈부귀천 없이, 삶의 방법이나 신앙 style의 차이에 구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을 위해서, 그들의 삶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해야 하며,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서 살아갈 때, 제도나 규정이나 program 이나 principle이 장애가 된다면 과감하게 그것들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을 위해서 사람들을 바꾸려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도 닮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사람을 위하여’ 사람 위에 군림했던 율법주의와 율법주의적인 사람들과 싸우시고, ‘사람을 위해서’ 잘못된 사람 평가(차별)와 싸우시고, 잘못된 안정감을 주는 제도주의와 싸우신 그분의 삶을 닮아야 하고, 결국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드리신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이가 만든 이야기인데 제가 약간 수정을 가한 것입니다.
옛날에 인류 최초로 “불을 만들어 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최초로 불을 만드는 방법을 발명한 후에 이 불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너무도 귀중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 만드는 방법을 전해주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불을 만드는 방법을 전해주고 그들이 불 만드는 방법을 배워서 잘 살게 되면 조용히 소문 없이 그 마을을 떠나곤 했습니다. 어느 날 다른 마을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마을에서도 불 만드는 방법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도 유익한 것을 전해주는 이 사람이 존경스러워서 이 사람을 따르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인기나 유명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직 많은 사람들이 불 만드는 방법을 배워서 따뜻하게 지내고 유익하게 살 수 있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따르자 마을의 지도자들은 시기를 하게 되었고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혔다고 모함을해서 결국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사람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초상화를 걸고 매주 기념하는 행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사람을 기리는 많은 규정도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했던 말이 소중하게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그사람의 명예는 회복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실제로 불 만드는 방법에는 관심이 없었고 결국 불 만드는 방법은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명예는 회복시켰지만, 자신이 유명해지기보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 주고 유익하게 해 주려는 그 사람의 소중한 마음을 회복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불 만드는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무척 실망했을 것입니다.

1998
권 종 선

행복가득 16-06-12 10:41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이 사랑했던 그 사람,  바로 이웃을 사랑해야겠습니다. 서로 행함으로 서로 사랑해야겠습니다.
명탐정레옹 16-06-12 10:45
 
서로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규연애비 16-06-12 13:25
 
사랑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셀레였을때가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것은 참으로 쉬우면서도 어려운듯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수 있는 에로스사랑...
주기만 하는 아가페사랑보다는 에로스 사랑이 될수 있도록 사랑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지뇽 16-06-12 18:17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깨닫고 느끼며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표현하는 삶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가츠 16-06-12 19:20
 
사람을 위하는 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듭니다.
저 또한.. 그러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공주 16-06-13 09:51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라고 하신 말씀
더욱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소피아 16-06-13 19:48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웃과 형제들에게 사랑으로 표현하고 행해야 한다는 말씀. 제일 가까이에 있는 이웃에게 실천하고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빗방울 16-06-14 23:23
 
나 자신과 사람들을 위한 기독교의 본질이 아닌 율법과 잘못된 전통방식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건 아닌지 다시 한번 깨달게 되네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사랑하셨던 것처럼  저도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따라 네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안타레스 16-07-11 16:30
 
진실된 마음이 다른사람에게 진실로 받아들여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기에 진실이더라도 돈으로 진실이 아닌 것으로 바꾸기도 하는 어지러움으로 그거 내 한몸 간수하기도 쉽지 않은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