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11-22 11:29
‘주의 품은 뜻 나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기도하는 사람들(살진 돼지를 행복하다 할 것인가)
 글쓴이 : 우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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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왜 그렇게도 많은 이단들이 생겨난 것일까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7:7)

우리 믿는 사람들은 기도에 관해 생각하거나 말할 때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떠올리기도 하고 언급하기도 할 만큼 기도의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한 가지로 말씀하시지 않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한 것일까요.
혹자는 ‘구하’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호소, ‘찾’는 것은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한 것을 얻기 위해 이어 하는 행동, 그리고 ‘두드리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하고, 그 같은 일을 인내하는 가운데 기다리며 계속적으로 반복하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저로선 이 같은 본문의 말씀에 따른 해석엔 공감이 되지 않지만, 그 해석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어 하나의 독립된 어구이라 한다면 그에는 절대적으로 동감입니다. 구하는 것을 주실 줄 믿음으로 기도하며, 그 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수험생이 합격을 위해 기도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실제의 행동으로 옮겨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무리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고 중도에서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합격증을 손에 넣는 순간까지 공부를 계속하듯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 토마스 롱 같은 이는 이 세 가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구하’는 것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고 하는 기도, ‘찾’는 것은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잘 모른 채 하나님께 나아가 그것을 찾는 기도, ‘두드리’는 것은 다급하여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경우 또한 본문의 말씀에 따른 해석엔 공감되지 않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그러니까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고 하는 기도가 있고, 또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잘 몰라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며 하는 기도가 있다는 데에는 견해를 같이 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의 다급한 일에는 그게 무엇이 됐건 무작정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구하’고, ‘찾’고, ‘두드리리’라 한 말씀에는 ‘무엇을’이라고 하는 목적어가 없으니 기도를 통하여 얻고자 한 것을 다양하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 이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말씀하심으로 목적어에 해당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병행절 눅11:13은 그것이 ‘성령’라 말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얻고자하여 기도드리는 것이 ‘성령’만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가장 범하기 쉬운 오류는 말씀의 한 절 또는 한 단락만을 떼어내어 독립된 말씀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사항을 놓고도 정반대의 표현으로 기록된 말씀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데에서는 같은 것인데도 하라 하는데, 다른 데에서는 하지 말라라 하는 것과 같은 식이지요. 그러기에 성경은 신구약 66권의 전면적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위 이단이라는 것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도 다 성경을 그렇게 읽지 않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어 자의적으로 해석한 탓이고요.




나의 품은 뜻 주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께서는 모두에 인용한 말씀의 바로 앞 장 마6:33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먼저’란 물론 시간적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중심이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마5-7장)의 절정에 해당되는 말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소중한 말씀이지요. 크리스천이 추구해야 할 가치관의 중핵입니다. 세속적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6:31)라고 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세속적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지상(至上)의 목표로 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중심에 놓고 기도해야 할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을 성경 66권을 알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알되 머리로, 지식으로가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기노스코<γινώσκω>·야다<ידע>)이지요. 말씀이 내 안에서 진짜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육화(肉化)이지요. ‘나의 품은 뜻 주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라 한 찬송가 540장(통219)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하여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고저러고 할 것까지도 없이 그 방대한 성경 66권을 다 알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요? 그렇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리 살겠다 결심하고 결단을 내려, 그것을 조금씩이라 할지라도 실천으로 옮겨 갈 수는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극난한 일입니다. 그리하다 죽게 되면 죽는다는 각오 없이는 안 되는 일입니다. 나의 아담의 후예로서의 인간된 모든 것, 육적이고 세상적인 모든 것, 못된 자아, 성질, 구습, 구태 같은 죄성(罪性)의 나를 죽이지 않고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요, 이 또한 말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역시 불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성경 66권을 정독으로 일독하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체험적으로 알아 실천에 옮기려 하는 시도인들 하기가 쉽겠습니까.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내용을 단순화 할 수 있는 데까지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요일4:8)이시니 성경을 요약하고 요약하면 결국 ‘사랑’이 됩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성경도 그러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했으니까요. (마22:37-40 참조)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우리의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2:5)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하여 살라는 의미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뜻대로 살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결국 성경 66권의 가르침에 따라 살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핵심의 말씀과 최상·최고의 예배


저는 앞에서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은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성경 66권의 중핵에 해당된다는 의미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는 성경 66권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작은 복음’이라 하기도 하고,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이라 하기도 하지요. 우리가 믿는 목적을 밝힌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이미 믿어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나라 백성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가기 전의 이 세상에서도 하늘나라를 누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12:1)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 하는 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12:1), 즉 최상, 최고의 예배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일상을 착한 삶이 되게, 사랑의 삶이 되게 하라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까지 기도의 중심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기도하다 보면 그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불분명한 때도 있습니다. 큰 맥락에서라면 이제까지 말씀드린 것과 같은 거라는 것을 알지만, 좀 더 세밀한 부분을 들어 기도하다 보면 잘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를 먼저 드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앞에서 기도에 관한 토마스 롱의 세 가지 견해 중 세 번째의 다급한 일에는 그게 무엇이 됐건 무작정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과거형으로 말씀드린 것은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지금 당장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 가기라도 할 경우, 무엇을 생각하고 말고 할 경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 살려주시라 그저 무작정 매달리는 것이지요. 얍복 나루에서의 야곱처럼,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있는 힘을 다해 매달리는 것이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의 본령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이루어 주시라는 기도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성경 66권의 말씀이 진짜 말씀이 되게 해 주시는 길로 들어서게 해주시는 것이지요. 말씀이 자신의 안에서 육화된다는 말입니다. 환언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으로부터 나오셔서 내 안에 들어와 살아계시며 주인으로서 나를 주관하시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림속의 호랑이가 밖으로 걸어 나오며 어흥 하고 포효하는 격이라고나 할까요. (그림 속 호랑이는 절대로 그리될 수 없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 안과 밖에 살아 계시며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는 가운데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다급하여 사력을 다해 매달린다고 다 그런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의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것이 우선일 경우에 한합니다.



살진 돼지를 보고 행복하다 할 것인가

우리는 열심히 기도했으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지 않으셨음에도 그 이유조차 알려 하지도 않고 그냥 또 다른 기도를 드리는 일이 많습니다. 그 기도를 이뤄 주시지 않는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사도 야고보를 통하여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약4:3)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의 정욕은 사전적 의미와 다른 데가 있습니다. 구하라, 주신다는 말씀은 전술한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기도를 전제로 한 것인데, 그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가 정욕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고보 사도를 통하여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약5:15)하신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약5:16)이 크다. 그렇다고 물론 ‘믿음의 기도’가 ‘병’만을 치료하는 것은 아니지요. 구한 모든 것을 이뤄 받게 하는 것이지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그 같은 믿음으로 기도드린 여인이었습니다. 불임의 그녀가 아들을 주시라 기도한 뒤 이미 수태를 한 것으로 믿고 수심 가득했던 얼굴에서 근심의 빛이 사라졌던 것이지요. 그리고 얻은 아들이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쉬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의 후예로서의, 죄성의 인간 나를 죽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그런 나를 완전히 죽여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설령 완전히 죽인다 해도 어느 틈엔가 다시 잡초처럼 돋아나는 것이, 인간의 내면에서 그처럼 돋아나는 것이 죄성입니다. 그러니 그러는 족족 잡초를 뽑아내어 제거하듯 제거해야 합니다. 거듭 하는 말이지만 죄성의 나를 죽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내 뜻대로 되어 주실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로 하나님의,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게 되는데, 그게 기도의 중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기도를 사력을 다해 계속 드려 가게 되면 나는 죽고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게 되는데, 그럼에 따라 자신이 드리는 기도를 이뤄 주신다는 믿음, 확신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으려고 예수를 믿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새 생명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12:1)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롬14:8 참조).
‘산 제물’ ‘살아도’ ‘죽어도’ ‘사나 죽으나’ 표현만을 놓고 본다면 살벌하기까지 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각오와 결단으로 기도하며 그리 살다 보면 죽어 영생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생전의 이 세상도 하늘나라로 누리며 살게 됩니다. 찬송가 438(통495)장 가사처럼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는 것이지요. 은총의 삶, 복 받은 삶, 행복한 삶을 누림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저만의 실하지 못한 행복이 아니라, 아니면 살진 돼지의 그것 같은 행복이 아니라,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 그런 풍요로워 실속 가득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두필님 21-11-25 16:08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위해 사는삶을 살수있을까요?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께 조금더 가까워짐을 느끼고, 사는동안 하나님의 품안에서 지낼수 있으면 좋겠네요.
행복가득 21-11-27 21:21
 
세속적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면 그것이 곧 행복한 삶이겠지요, 그것이 참 기쁨이겠지요
로케 21-11-30 18:08
 
항상 마음속으로 예수님의 뜻을 품고 더욱 식구들과 가까워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주님이 가르키시는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식구들과 더불어사는 삶을 살면 정말 감사할것 같습니다.
윤지 21-12-01 13:52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이루어주실 거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고 사랑하고 베푸는 모두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찬양 21-12-07 22:28
 
글을 읽으며 저의 기도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세속적인 기도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는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것처럼 저도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선희 21-12-07 22:54
 
기도하는 것도 아직 어색한 시기인 때에 글을 읽으며 어떻게 기도를 해야하는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세상적인(이기적인)기도보다는 하나님이 원하는 기도를 해야한다 생각합니다.
소피아 21-12-11 10:13
 
사력을 다해 기도드리면서 나는 죽고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안에서 저 뿐만 아니라 모든이가 행복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