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10-29 15:57
발바닥 같은 양심, 눈 같은 발바닥(몸은 숲속 길 산책 영혼은 성경 속 여행)
 글쓴이 : 동그리
조회 : 220  
육지에서 제주도로 거처를 옮겨와 서귀포 칠십리의 그 이름난 서귀포, 그것도 해군기지 건설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강정마을의 그 강정동에 둥지를 틀고 머무른 지 벌써 반년이 지나 7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이 동네 강정동은 서귀포혁신도시라고도 하고 신서귀포라고도 하는 지역에 속해 있는데, 가는 데마다 나무가 많을 뿐 아니라 욱어진 숲의 크고 작은 공원이 많아 세파에 시달려 지친 영혼들이 쉬기에 좋은 곳입니다. 거기에다 풍광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뿐이 아니에요. 이곳에는 고근산이라고 하는 표고 400m 쯤의 산이 있고, 그 앞에 조그맣고 나지막한 동산이 하나 있는데, 울창한 숲 사이로 산책로가 몇 개나 나 있어 갈 때마나 골라 걷는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 돌아오기까지 한 시간쯤 걸리는 이 걷기 좋은 길은 저에겐 은총중의 은총이지요. 그래서 거의 매일처럼 이 길을 한 바퀴 돌아온답니다.
산책을 한다 해서 물론 걷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하지요. 무슨 생각을 그리 많이 하냐고요. 생각이라기보다 자신 안의 자신과 만나는 거라 하면 어떨지 모르겠네요. 만나서 너는 왜 그 모양으로 생겨먹었느냐, 좀 더 사람다울 수는 없느냐, 힐문을 하기도 하고, 그러지 말라 타이르기도 합니다. 그 힐문이나 타이름이 되는 기준은 저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를 믿는 사람임이 틀림없다보니 물론 성경이 되지요.
그러고 보니 몸은 동산 숲속 길을 산책하나 정신은 성경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이네요. 그러며 하나님을, 성삼위 하나님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만나 그분의 본질과 속성을 들여다보려하기도 하고 뜻과 섭리를 알아보려하기도 합니다. 그분의 마음을 살펴보려하기도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의 그 마음 말이에요.
그런데요, 하나님을 만나기는 하는데, 그 모습이 희미하게만 보여 그분의 무엇 하나 또렷이 보이는 게 없습니다. 그분의 저 자신을 향하신 사랑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때로는 그 사랑으로 인한 환희로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하는데, 그런 건 어쩌다, 정말 어쩌다 일뿐이에요.
하기야 저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진짜로 직접 뵐 수는 없지요. 그분의 그 크신 영광으로 죽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에요. 모세 같은 이에게 조차 등만 조금 보여 주실 뿐이었잖아요.
우리는 성경 속으로 들어가 만남으로 그분을 알아(기노스코:γινώσκω) 갈뿐인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 속의 산책만으로는 그분을 진짜로 만나 진짜로 알아 갈 수가 없어요. 읽는 것, 읽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그분을 진짜로 알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으니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지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주신 일차적인 목적이 거기에 있는 거고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의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바로 그것, 하나님을 정말로 만나 정말로 알아가며 그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죽도록 사랑함으로 섬기는 것이거든요.
이대로 말을 이어가다가는 한이 없을 것 같네요. 이정도로 해 두고 다시 숲속 길 산책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시한 사람의 시시한 이야기

한 번은 산책로로 들어가 갈림길에 닿았을 때 거기에 신발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후에도 그런 걸 두 세 차례 더 보았는데, 한 켤레만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신발을 벗어놓고 맨발로 걸었던 것이지요. 저는 그걸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도 한 번 해봐! 하는 유혹이 생겼습니다.
왜 발바닥 같은 양심이라는 말 있잖아요. 양심에 털 났다고도 하는 무뎌진 양심에 대해 한 말이지요. 사람들은 그런 양심은 안 된다며 조그마한 잘못에도 아픔을 크게 느끼는 눈 같은 양심이어야 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저는요, 양심이 아니라 발바닥이 눈 같이 예민하여 맨발로는 땅바닥을 그 표면이 조금만 거칠어도 아파서 밟을 수가 없는 거예요. 냇가나 바닷가의 자갈밭을 밟았다가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지요. 그러니 내 발바닥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처럼 좀 무뎠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지요.
벌써 오래전 일입니다만, 큰애가 중1 여름방학 때였다고 기억하는데,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가서 한 1주일 있다 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백약이 무효였던 고질적인 무좀을 고쳐 가지고 온 거에요. 까닭을 물으니 모르겠다며, 1주일 내내 맨발로 나다닌 것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생각났고, 왠지 지압효과도 있을 것 같아,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삼조의 효과를 생각하고 저도 맨발 걷기 결단(?)을 내려 바로 착수했습니다. 지난달(8월) 6일이었으니 벌써 한 달이 훨씬 지났네요. 그런데 효과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눈 같이 예민한 발바닥이 발바닥 같은 발바닥으로 무뎌져 가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말도 못하게 아팠으나 조금씩, 정말이지 조금씩 완화되어 지금은 아프기는 해도 견딜만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말랑말랑하던 발바닥이 제법 단단해지기도 했고요.
그런데요, 인간의 욕심이란 한 이 없는 거라서, 아니지요, 제가 유독 어리석은 인간이라서 일석삼조로는 성이 안 차 일석사조를 바라게 된 거예요. 눈 같이 예민했던 발바닥이 발바닥 같은 발바닥으로 무뎌져 감과 동시에, 발바닥 같았던 양심은 눈같이 예민한 양심으로 바뀌어 갔으면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된 것이지요. 인간이 어리석다 보니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시시한 사람의 시시한 이야기지요.
그러나 역시 맨발 걷기를 시작한 건 잘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발바닥이 발바닥 같이 무뎌져 가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리석어 시시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어리석은 사람으로서는 자기를 돌아다보는 한 단면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 걸, 자기를 돌아다보는 걸 좀 유식한 말로는 자기성찰이라 하는 모양인데, 자기성찰을 하는 사람은 역지사지를 하게 되고, 그러면 내로남불 같은 일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어 우리 사회가 사람 살맛나는 세상으로 조금씩이라 할지라도 바뀌어 가는 거라는 생각이거든요.
왜 있잖아요. 소크라테스인가 누군가 하는 철학자가 했다는 말 말예요. “너 자신을 알라”는. 이 말은 실은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라는 의미라는데, 그렇지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요, 그런 사람일수록 남을 비난하는 데 명수라는 것이고 전형적인 내로남불의 주인공이라는 거예요. 
하긴 그런 사람들이야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거든요. 짐이 곧 법이라고 하는 식이지요. 어떤 때 보면 저분 혹 자기를 절대자로 착각하는 건 아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지요. 논리적으로 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그 논리라는 것이 자신의 내로남불을 증명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게가 가재보고 옆으로 가지 말고 앞으로 가라는 식이고, ×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식이지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온 우주에 절대자는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는 일마다 모두가 절대로 옳고 절대로 바른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래서 자기성찰이 필요하고 역지사지가 요구되는 것이지요. 남을 비난하기 전에 자기부터 돌아보고, 설교를 하고 글을 써도 먼저 자신부터 살펴봐야 하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여러분께서도 그렇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두필님 21-11-25 15:57
 
자기 자신의 무지와 잘못은 잊고 남을 비난하는것에 열중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디 그러한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소피아 21-12-11 10:02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기 전에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