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9-13 09:17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글쓴이 : 동그리
조회 : 265  
왜 신앙 좋은 사람이 자존심 강하면 안 되는가?

“나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여러분은 덕망이 있다는 누군가의 성도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어떤 생각이 드실 것 같습니까. 저는 오래전의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런 분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꽤 큰 농장을 생활터전으로 한 신앙공동체의 중심이 되신 분으로 공동체내에서 뿐 아니라 많은 지인들로부터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는 분으로부터였습니다. 
1970년을 전후로 한 시기의 우리 농촌은 화학비료의 남용으로 농작물이 웃자라 병충해가 심했고, 따라서 농약 또한 그 남용이 심해, 그로 인한 피해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농민들 중에선 중독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했고, 심하면 죽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이 같은 문제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타개하고자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는데, 정농(正農)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농작물의 무 농약 재배 운동을 벌인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 운동의 파급효과는 상당했고, ‘선생님’은 그 중심인물 중의 한 분으로 국제적인 큰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분이 자기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한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는 남달리 뛰어난 사람이라는 투의 뉘앙스로였습니다.
저의 이런 말에 신앙 좋은 사람이 자존심 강한 게 뭐가 그리 나쁘냐 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나, 나쁜 것이 사실입니다. ‘자존심’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단적으로 말한다면 반론도 없지 않을 테지만,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이 글자를 풀어 한 해석이니 어떻든 이 말 ‘자존심’에는 ‘스스로를 높인다’는 의미가 깊숙이 내재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짐으로 남이 높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존심’은 ‘자만심’의 전단계로 양자는 동류거든요. 그리고요, 이 ‘자존심’이나 ‘자만심’은 우월감을 이루는 저변이 되는 것이지요. 또요, 우월감은 열등감 못지않게 기독교 신앙의 독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남보다 열등하지도 우월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성삼위 하나님을 자신의 안에 주인으로 모신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아무리 못생기고 값어치 없는 질그릇 같은 자신일지라도 안에 존귀하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으니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설령 금 그릇처럼 귀한 존재라 할지라도 그게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비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릇의 가치는 그 자체보다 담겨 있는 내용물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소중하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월한 것 아니냐고요? 설령 그렇다 해도, 사실이 그렇다 해도, 그러니까 우월하다 해도 우월감은 안 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내 공(功)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 은혜를 진정으로 느끼며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독실한 크리스천이며, 그런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도 하늘나라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인 것이지요.


한국이나 일본, 중국 같은 나라가 왜 極東인가
― 우리가 본 한국은 極東이 아니라 中心이다 ―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그런 우월감의 소유자로서의 표본이 될 만한 인물을 문학작품(소설)의 등장인물 가운데서 한 사람 소개해 볼까 하는데,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주인공 로드리고가 그입니다.
얼마 전의 이 란에 실린 졸고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입니다”를 통해서 <침묵>의 배경과 그 주인공 로드리고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린 바 있으니, 여기에서는 그 연장선에서 그의 우월성에 관한 말씀을 좀 드려보려 합니다.
로드리고는 포르투갈 예수회에서 선교를 위해 일본에 파견한 신부인데, 나가사키(長崎)에서 관헌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선교사 붙잡히면 처형하기 전날 말에 태워 나가사키 시내를 끌고 돌아다니는 관례가 있었는데, 백성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지요. 로드리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요, 선교사가 본국을 떠나 선교지로 향할 때에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 민족이나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 둘째, 선교지와 그곳 사람들에 대한 따사로운 이해이지요. 그러나 로드리고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말에 태워진 그는 연도의 사람들을 의식하여 일부러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 표정을 유지하려 애를 썼습니다. 굴욕과 모욕을 참는 얼굴이 인간의 표정 가운데에서 가장 고귀하다고 예수가 가르쳐 줬다며, 지금이야말로 끝까지 이 표정을 계속할 수 있는 적기라는 생각에 안간힘을 썼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는 간과했던 것입니다. 이럴 경우 예수의 관심은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가 있었다는 것을 그는 몰랐던 것이지요.
그래서였겠지만 그런 상황에서의 로드리고의 관심은 항상 타인 아닌 자기에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관헌의 수장과의 논쟁에서 자기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우세하다 여겨졌을 때는, 등 뒤의 감옥에서 신도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자기가 이겼다는 생각에 뿌듯한 쾌감까지 느끼며 자신이 마치 영웅이라도 된 것 같은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는, 우리들 사제는 단지 인간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만을 위해 태어난, 그래서 가련한 종족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나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제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땅 끝의 나라에서 나는 사람들을 위해 ‘유용’하다며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요.
얼핏 보기엔 로드리고 그는 몹시 헌신적인 인격의 소유자인 것 같지만, 그의 이러한 생각은 사제로서 가져서는 안 되는 오만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의 반증이었던 것입니다. ‘땅 끝의 나라’라는 말도 ‘극지(極地)’라는 발상에서 온 것으로 무례하기 그지없는 어투입니다. ‘극지’ ‘극동’ 같은 말은 자기네들 유럽을 기준으로 한 말이지 우리 한국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 입장에서 본다면 ‘극지’일 리도 없고 ‘극동’일 리도 없지요. 자기 나라가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기 義는 하나님의 義를 거부한다.

저는 여기에서 목사님들께, 특히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교계로부터도 인정을 받고 계시는 목사님들께, 목사님께도 이 같은 우월감이 조금이라 할지라도 있는 건 아니냐고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면밀하게 들여다봐도 자기에게는 그런 면이 없다고 한다면 목사님은 정말이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마땅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들뿐 아니라 주위로부터 크고 작고 간에 인정을 받고 있는 분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드려 보고 싶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런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대단히 겸손한 것 같은데, 조금만 눈여겨보면 자기가 최고라고 하는 교만이 됨됨이에 묻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이들이지요.
또 어떤 이들은 타인을 무시함으로 자기가 우월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곤 하는데, 그런 이들은 영리한 데가 있어 자기에게 탈이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골라서 그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부는 둘이 다 우월감을 자신들의 영특함 속에 숨기고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무난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리 안 그러려 해도 가끔 욱하는 일이 있어요’라는 누군가의 말에 그 아내 된 사람 왈, ‘그런 거야 O선생 같은 이도 그러는 일이 있는데요, 뭐.’ O선생이란 자기 남편으로, 자기 남편 같이 훌륭한 사람도 그런 정도의 과오는 있다는 거였습니다.
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냐고요? 그러나 아니지요. 아닙니다. 자존심이 됐건 우월감이 됐건 그런 것들은 자기의(自己義)로 영혼이 오염된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기독교 신앙과는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
자존심이요? 자기의 그것에 상처가 났다며 발끈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런 사람들일수록 상대방의 자존심 같은 것은 무시하기 일쑤이지요. 자존심은 자기만이 누려야 할 특권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은 소중히 여기며 타인을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 눈의 들보는 놔 둔 채 남의 눈의 티를 빼라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자기의의 소유자는 하나님의 의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자존심이라든가 우월감 같은 못된 자아가 기독교 신앙에 얼마나 강력한 독소가 된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어디 내가 잘나 나의 노력으로 된 것인가요? 그럼 노력 없이 된 일이 어디 흔한 것이냐고요? 말인즉슨 노력 없이 운만으로 된 일이 어디 그리 많으냐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렇지요. 그러나 신·불신을 막론하고 온 우주의 모든 것은 창조주의 주재에 의해, 뜻과 섭리에 의해 되어져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 그것을 부정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지요.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의지에 의한 노력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한 산물이지요. 그러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이 자기에 의해 된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의로 말할 것 같으면 자기 의가 되는 것이지요. 성삼위 하나님의 인도나 도움 같은 것은 필요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와 붙잡아 도와주심이 필요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구해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잘나 나의 힘으로 그리 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의로움이 있다면 그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해 주셨기 때문에 그리된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깨달아 감사드리며 산다면 그것이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언제까지나 갈증 없이 생수처럼 줄곧 시원하게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일상의 삶입니다. 그런 삶이 영적 예배, 그러니까 최상의 예배입니다. 자존심이라든가 우월감 같은 것을 가지고는 드릴 수 없는 가장 존귀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義를 모르고 자기 義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義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10:3)>


알림: 졸고 중 <침묵>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나 표현의 많은 부분은 졸저 <엔도 슈사쿠가 빚어 만든 神>에서 차용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동그리 21-09-13 11:05
 
많은 부족하지만  이세상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큰 감사드리고 저도 언제까지나 갈증없이 생수처럼 줄곧 시원하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드리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행복가득 21-09-16 19:12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하나님을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신 소중한 존재로  은혜안에 거하고 있음을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며 멋진 삶을 살고 싶습니다.
두필님 21-09-16 22:57
 
지금 제가 이곳에서 일할 수 있는것도,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게 되니 저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라 느끼게 하네요. 제가 지금 느끼고,  가지고있는 행복이 영원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윤지 21-09-17 09:33
 
자신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자존심이 높습니다.
자존심이 높은 사람은 마음의 안정이 있어 주변사람도 챙기고 베풀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만해서는 안되고 항상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피아 21-09-17 15:44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나를 스스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짐으로 남이 높여주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다시금 느낍니다.
로케 21-09-25 21:51
 
어느 사상이든 거기에 자긍심을 가지고 행동하는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신앙이 될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너무 그곳에 빠져서 갈길을 잃어버리면 안될것 같더군요 그렇기에 어떤 길이라도 바로 볼수있는 정신이 필요한것 같습니다.
영미 21-10-01 22:27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뜻만 잘 알고 행한다면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걱정일까요
다만 사람인지라 생각과 행동이 어긋나는 일이 많기에
늘 반성하고 바른 길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드리는 것 아닐까요?
'언행불일치'하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이강현 21-10-17 18:34
 
성경에 통해 읽어보면 요한일서4장 16절말씀이 생각나는데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안에 거하시느니라 라는 있다는 말처럼 하나님에 품에서 두렵지 않게 생활하면 하나님께 온전한 삶에서 살아갈것이라고 믿습니다.
대호 21-10-26 00:05
 
내가 해낸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심으로 인해 내가 있는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들을 위해 낮은 자세로 겸손히 섬기려고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