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9-13 09:15
종교행사와 예배 사이에 흐르는 강
 글쓴이 : 동그리
조회 : 111  
예배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행위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종류도 주일 대예배와 오후예배, 수요예배, 구역예배, 새벽기도를 여는 새벽예배, 송구영신예배, 가정예배, 개업예배 등등 실로 다양하고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배란 단적으로 말해 무엇일까요. 알기 쉽게 말하면 어떤 것이 될까요. 여기에서 저의 그것,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는 예배에 관해 말씀드려 보려고 합니다. 그 신학적인 것, 교리적인 것은 잘 정리되어 나와 있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으니, 여기에서는 제가 느껴온 예배, 제가 생각해 온 예배에 대해 말씀드려 보려 합니다. 그것은 물론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미묘한 차이는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그것이 성경에 부합되지 않고 조금이라 할지라도 괴리가 있다면 두말없이 버려버리시라는 부탁말씀부터 드립니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은혜도 보통 은혜가 아니라 목숨을 내어놓아도 아깝지 않을 만큼 큰 은혜이지요. 영영 죽을 무리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무리들 가운데에서 나를 특별히 뽑아내셔서 영생을 주신 은혜를 입었으니 목숨인들 아깝다 내어놓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지요.
영원히 죽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서 간 저 세상이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막9:48) 않는, 죽으려 해도 죽을 수조차 없는, 그런 괴롭고 고통스러운 지옥에서 영원토록 끝까지 산다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리될 수밖에 없는 나를 선택하셔서 그 같은 영벌 아닌 영생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하시는 영생을 주신 것이니 그분을 위해서라면 목숨인들 아까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목숨을 내어놓으라 하시지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말이지요. 그냥 그런 마음, 그런 각오로 살라 하시는 거지요. 그러면 그걸 순교로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생활의 순교, 삶 가운데의 순교를 바라시는 거지요. 그러니 은혜 위에 은혜요, 그저 감사한 것뿐이지요.
그런데 저는요, 이에 하나 더해, 길가에 버려진 비루먹은 강아지 같은 저를 주어다가 당신의 아들로 삼아 좋은 음식과 옷으로 길러 주시고 계심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어엿한 아들이 아님에도 어엿하게 되고자 하는 그것만으로 어엿하다 인정해 주시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감사할 따름이지요.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이럴 경우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대처럼 감사할 것이라고요? 그렇지요. 감사해야지요. 그런데요, 저는요, 감사가 극에 달하면 그게 찬송, 찬양이 된다고 생각해요. 노래로 부르는 찬송이나 찬양 말고요, 하나님의 은혜를 온몸과 마음으로 높이 기리고 칭송하는 그런 찬송, 그런 찬양 말입니다. 그리고 그게 주체할 수 없이 크게 고양되면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게 될 것 같아요. 그러나 하나님께, 육안으로 뵐 수 없는 하나님께 절을 올릴 수는 없지 않아요. 하긴 <죽으면 죽으리라>의 안이숙 여사 같은 분은 실제로 하나님께 큰절을 올리기도 했다 해요. 실행은 못했지만 저도 그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던 적이 한두 번 있기는 합니다.
예배는 그런 마음의 자세로, 그러니까 하나님께 큰절을 올리는 것 같은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하는 모든 순서에 그 같은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지요. 그래요, 그러기에 예배를 경배라고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경배로서의 예배, 다시 말해 하나님께 큰절을 올리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라 할지라도 예배 그 자체만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한낱 종교행사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그 정신이 사후(事後)의 생활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어떻게?’라는 의문이 생기시지요.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우리의 삶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에 맞춰져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언행심사가 세상적으로 아무리 바르고 착하다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노여워하시거나 슬퍼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른 것도 착한 것도 아닙니다. 버려버려야 할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위 말씀은 ‘거룩함’이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거룩’이란 다 아시는 대로 무엇인가가 범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고도 위대한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해 구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성별(聖別)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리되어가고 있는 상태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말씀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몸’은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의 전인격, 전존재를 말하는 것이지요. 문제가 되는 것은 나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인데, 제상에 올린 제물은 살아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물이란 그것이 무엇이 됐건 죽은 것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단 한 번 밖에 쓸 수 없는 일회용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제물이라는 것이 ‘산 제물’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지지요. 살아 있으니까 계속해서 드릴 수가 있는 것이지요. 세상은 하나님 앞에 차려진 제상이요, 우리는 그 제상 위의 제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요, 제물은 제사를 받는 대상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습니다. 그 대상이 기쁘게 흠향하기를 바랄뿐이지요. 그래요. 산 제물인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해 어떠한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무엇 하나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요구할 것이 있다면 산 제물인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게 해 주시라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말하자면 그러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시는 것이라는 거지요.
한데, 말씀은요, 그렇게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 하고 있는데요, 그 ‘영적 예배’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한 마디로 한다면 ‘최상, 최고의 예배’가 되는 것이지요.
끝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드리고 있는 모든 ‘예배’에는 우리 각자의 전인격, 전존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일상의 삶이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가끔은 감사가 극에 달해 그것이 온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찬송과 찬양이 되고, 그리고 그것이 더할 나위 없이 고양되어 큰절이라도 드리고 싶어지는 그런 삶이 ‘예배’에 이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들로 너희 착한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두필님 21-09-16 22:45
 
교수님의 글을 읽고나니 주말마다 참여하는 예배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배가 제삶의 일부가 된 요즘 더욱  노력하고 공부해 제 삶의 일부가 아닌 전부가 될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소피아 21-09-17 16:05
 
그저 몸만 왔다 가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산 제물로 저희를 드리는 예배를 드리길 원하고  그 예배가 일상의 삶으로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행복가득 21-10-12 17:30
 
하나님의 은혜가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며 내가 드릴 예배라고 하셨는데 매 순간마다 넘어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말씀으로 또 다시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강현 21-10-17 18:27
 
하나님의 맞이하는것은 예배고 순간순간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하나님께 축복하고 기도하는 삶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