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7-28 13:55
기독교의 경전은 성경입니다
 글쓴이 : 동그리
조회 : 211  
일본에도 기독교의 전성시대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느냐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문학이라는 것을 연구했던 사람이었으니 학자임이 틀림없지만, 학자라 불리기엔 많이 부족하니 그냥 문학연구자였다고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그것도 황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다 보니 문학연구자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주제에 저는 전공이 아닌 것에까지 손을 대는 외도까지 했습니다. 소설 <눈 고장(雪國)>(일본어 ‘雪國’을 우리말 ‘설국’으로 옮긴 것은 오역임)과 노벨문학상으로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많이 알려진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전공했으나,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 보니 기독교 문학에도 조금은 관여했는데, 그게 엔도 슈사쿠라는 작가였습니다. <침묵(沈黙)>으로 우리에게도 그다지 낮 설지 않은 작가이지요. 
그런데 오늘은 그 엔도 슈사쿠에 대해서, 아니 그의 신앙에 대해서 좀 말씀을 드려 보려 합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작가로서의 그를 좋아할 뿐 아니라 존경합니다. 벌써 오래 된 일이지만 <침묵>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사람이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영화 <벤허>를 봤을 때의 감동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소설의 작품론을 쓰며 꼼꼼하게 분석해 가며 읽을 때는 그 문학성에 소리 없는 탄성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설에 드러난 신앙은 성경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작가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깨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정통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말이지요.
어떻든 그 소설 <침묵>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 이야기인데요,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예수회(Society of Jesus) 설립자의 한 사람 프란시스코 사비엘에 의해서였습니다. 1549년의 일이지요. 그 후 일본의 기독교는 우리와는 달리 순조롭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일본은 군웅들이 할거하는 전국시대였는데 오다 노부나가(小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등이 종교적 이유가 아닌 무역을 통한 이익과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불교세력 억제 등을 목적으로 예수회 사람들과 가까이 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요, 이때 일본에서의 신자 증가는 가히 놀랄 만했습니다. 한때 30만에 이르렀거든요. 총인구가 2천만에 불과했던 때이니 그 대비 기독교인 수가 1.5%로 현재의 일본 기독교인의 비율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일본의 기독교에 때 아닌 오뉴월에 된서리가 내렸습니다. 1587년 7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통일 정책에 기독교가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탄압을 시작한 것이지요.
그후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바쿠후;幕府)의 초대 쇼군(将軍)이 되자 기독교를 철저하게 금지시켰습니다. 신도들을 붙잡으면 가차 없이 화형(火刑)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신도들의 신앙을 뜨겁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막부는 배교정책을 썼는데, 그들은 신도들을 배교시키는 데엔 고문이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갖가지의 고문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고 많았는데, 여기에 그 대표적이라 할 만한 것 두 가지만 소개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 하나는 수책(水磔)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조수가 밀려간 바다에 기둥을 세우고 거기에 사람을 묶어 놓는 고문에 의한 처형방법이었습니다. 만조가 되면 해수가 목까지 차오르고, 그러기를 반복하는 동안 대개가 1주일 정도로 죽는, 그런 잔인한 방법이었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구덩이 매달기(穴吊り)라는 것인데, 이런 것입니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는 방법으로 이 또한 고문이자 처형방법이었습니다. 깊이 판 구덩이에 오물을 넣은 다음 그 위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는데, 그대로 두면 머리에 피가 고여 죽기까지의 시간을 단축시키므로 이마나 귀 뒤에 칼로 작은 상처를 내어 피가 조금씩 흐르게 해서 고통의 시간을 늘리는 방법이지요. 대개는 하루 이틀로 숨을 거두나 강인한 사람 중에는 1주일 이상이나 견디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작가 엔도가 주물러 만든 神

그런데요, 소설 <침묵>의 주인공은 로드리고라는 예수회 소속 포르투갈 신부로 포교를 위해 일본에 파견되어 온 인물인데, 이 같은 고문을 수도 없이 봐 오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갇히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그를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하여 배교시키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수많은 신도들을 배교시키는 것보다 지도자 신부 하나를 그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저들은 신도들을 배교시키는 기발한, 아니 별로 기발하진 않지만 하여튼 효과적인 도구 하나를 생각해냈습니다. ‘후미에(踏絵)’라는 것으로 직역하면 ‘밟는 그림’이 되는데, 신도들을 가려내기 위해 밟게 했던 예수 상 등을 새긴 판이었습니다.
저들은 신도로 의심스러운 사람들에게 이 후미에를 밟게 하여 밟지 않으면 신도로 간주해 잡아가두고, 밟는다 해도 얼굴표정에 고통스러운 빛이 희미하게라도 떠오르면 신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저들 관헌은 로드리고에게 그 후미에를 밟으라 했습니다. 배교를 하지 않아도 좋으니 배교한 척하여 밟기만 하면 풀어준다 했습니다. 당신이 그냥 밟기만 하면 옥중의 신도 모두를 풀어준다 했습니다. 그들은 밟지 않아도 풀어준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밟지 않으면 신도들이 밟는다 해도 다 죽이겠다했습니다.
로드리고의 번민은 극에 달했습니다. 신도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것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후미에를 밟으므로 배교를 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이 소설 <침묵>의 세계에 있어서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는데요, 독자들로 하여금 숨을 죽이게 하는 가장 극적인 장면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이 장면을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 나름대로 재구성해 볼까 하는데요, 이런 것입니다. 

여명의 희미한 빛에 로드리고의 닭의 그것과도 같은 목과 쇄골이 드러나 보인다. 그는 양손으로 후미에를 들어 자기의 볼에 대었다. 후미에 속의 예수가 슬픈 눈빛으로 로드리고를 바라본다. 로드리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고귀한 것이 되어 나의 마음속에 살아온 그것을 나는 이 발로 밟으려는 것이다. ‘아, 아프다’ 로드리고는 떨었다. 발을 들었다. 발에 둔하고 무거운 아픔을 느꼈다. 자신의 생애 가운데에서 가장 정결하다고 생각해온 것, 인간의 이상과 꿈으로 가득 채워진 것을 밟는 것이다. 이 발의 아픔. 그 때였다. ‘밟아라!’ 라고 동판의 그 사람은 로드리고를 향하여 말했다.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을 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 것이다.’ 이리하여 로드리고가 후미에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멀리에서 울었다. 

어떻습니까. 감동적이기까지 한 장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장면에서의 하나님은 다름 아닌 엔도가 부조(浮彫)하여 만든 신(神)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하나님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 같은 상황하의 로드리고에게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후미에를 밟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시는 분이심임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밟으면서까지, 그러니까 당신을 배반하면서까지 그러라 하시진 않습니다. 밟지 말고 죽으라 하시는 분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사랑이 하나님사랑보다 먼저일까요?

그럼에도, 그리고 한 소설가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함에도 <침묵>의 이 장면을 들고는 그처럼 사람사랑이 하나님 사랑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가르치셨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가르치셨다 하드냐고요? 예,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제시하드라고요. 여러분도 읽어 보시고 정말 이 말씀들이 사람사랑이 하나님 사랑에 우선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①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②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25:40)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 한 것이니라. (45)
③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막7:11-13)
어떻습니까. 이런 말씀인데도 여러분 역시 하나님보다 우선하여 사람을 사랑하라 가르치신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병자를 고치는 것이 우선이라 가르치셨다며 그 근거로 예수님의 안식일에 병 고치신 사례들을 들고 있는데, 그 또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그 목적을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무엇보다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을 위해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안식일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 안식일을 오히려 사람들의 무거운 짐이 되게 하여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명확히 이해가 되지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7:6-9)
앞에서 든 ‘고르반’에 관한 말씀(막7:11-13)에 조금 앞서 하신 말씀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병자를 고치는 것이 우선이라 가르치셨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을 우선시하는 것을 책망하신 것이지요. 주객의 전도를 나무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도, 율법을 어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습니다(마5:17).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마12:8)이시지요. 안식일뿐 아니라 천지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랑케(Leopold von Ranke, 1795년-1886)는 말합니다. 주님은 그 자신이 신령한 안식이 되므로 그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 준수가 되며, 그를 떠나는 것은 바로 안식일 파괴가 된다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요, 소위 크리스천이라는 이들의 사람사랑이 하나님사랑보다 먼저라는 발상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병자를 고치는 것이 우선이라는 발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든 안식일에 관한 것은 앞에서 나름대로 설명을 드렸으니, 이제 사람사랑과 하나님사랑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가며 약간만 더 말씀드림으로 이야기를 마치려 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4-38)
이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사랑과 사람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는 있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사람도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본질)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은 바로 인간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자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 사랑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 하셨고 그 다음의 둘째로 이웃(사람)사랑을 드셨습니다. 앞에 인용한 ①의 말씀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되는 것이지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그 순수성은 의심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사랑이 우선이고 인간사랑은 그 다음입니다. 만약 인간사랑이 하나님사랑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면 그것은 가차없이 버려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같은 이유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그분은 조물주시고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은 조물주이신 하나님께 속해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평안하고 평화롭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니 경배(예배)드릴 수밖에 없고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또 감사하게 되고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후기: 드린 말씀 중 엔도 슈사쿠에 관한 내용의 많은 부분은 졸저 <엔도 슈사쿠가 빛어 만든 神>(08.7,22. 충남대학교출판부)에서 빌려다 쓴 것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작품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일독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동그리 21-07-28 14:47
 
이 칼럼을 통해 일본에도 기독교의 전성시대가 있다는걸 알았네요~ 하나님사랑과 사람사랑이 별개가 아닌 하나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규연애비 21-08-05 16:34
 
각나라의 기독교의 전성시대가 있었다고 이글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평안하고 평화롭고 감사와 기쁨을 누릴수 있는 기회 즉 기독교 신앙을 통해 느끼는 글이네요
두필님 21-08-15 20:24
 
제가 평안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품 안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니 그 것 또한 저에게 평안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네요 ^^ 
제가 지금 느끼고 있는 기쁨과 행복이 지속되기를 바라며 항상 하나님 안에 속해있기를 희망합니다.
로케 21-08-20 21:41
 
여러나라에 있는 기독교 전성시대의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깊은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신토문화가 발달해 있어서 그곳으로 전파되는 기독교가 독특하게 전파된 느낌도 있는것 같아요.
영미 21-08-23 23:27
 
왠지 일본하고 기독교하고는 별개라고 생각했었는데 일본에도 기독교의 전성기가 있었다니 조금은 신기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정신을  지금까지 제대로 물려받았다면 지금의 일본의 모습은 달라졌을까? 라고
잠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올바른 기독교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어 기쁘고 그로 인해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감사로 넘쳐남에 행복함을 느낍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봄날 21-08-24 21:11
 
주님 안에서 평안하고 평화로움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그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늘 기도하겠습니다.
이강현 21-10-17 18:18
 
일본에는 90%이상 불교라고 하는데 제목부터 남달랐았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대단하시고 기독교는 전세계에서 알아주고 계시니 항상 간절한마음으로 기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