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6-25 15:39
십자가 밑의 야바위꾼들 ― 십자가 첨탑 아래 술판을 벌여놓고 주님을 기다리다 ―
 글쓴이 : 동그리
조회 : 196  
오늘은 저희 교회 지난주 주일예배 설교 일부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제가 받은 은혜에 대해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전하신 목사님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고, 또 본래부터 머리가 좋지 않은데다가 기억력이 쇠퇴한 처지이고 보니 내용 또한 사실과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름대로 자료를 보충하기도 할 것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7-8)

우리는 청년 전태일을 알고 있습니다. 살아 있다면 지금 70을 넘긴 노인이 됐을 그는, 1970년 11월, 채 피어보기도 전인 22세의 젊다기보다 아직 어린 나이에 분신으로 세상을 뜬 사람이지요.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당시의 국민학교) 4학년 중퇴,17세 때부터 서울 평화시장에서 봉제공으로 일했는데, 처음에는 하루 14시간씩 일하며 그 대가로 받은 것이 50원이었습니다. 차 한 잔 값이었지요.
그는 그런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며, 자기보다 어린 여공들이 턱도 없이 작은 보수에 과중한 노동으로 착취당하는 현실을 온몸으로 느끼는 가운데 노동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야간작업으로 지친 여공들을 돌려보내고 혼자 남아 밤새 대신 일을 해 주기도 했으나 남는 건 사업주의 호된 책망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서울시청이나 노동청 같은 데를 찾아가서 진정서를 내기도 하고 신문사와 방송국을 찾아가 노동의 현실을 보도해 달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노동실태조사 설문지 120여장과 90명의 서명을 받아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장 앞으로 제출했습니다. 1970년 10월 6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에 관한 기사가 석간으로 발행하는 〈경향신문〉에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제목의 사회면 톱으로 실렸습니다. 봉제사들의 사기는 충천했고 사회의 반응도 뜨거웠습니다. 업주들과 정부는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업주도 정부도 합리적인 문제해결 같은 것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오히려 사회주의적 사상으로 몰고 가며 탄압의 고삐를 더욱 죄어 갔습니다.
그렇다고 그때에도 근로기준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태일 그와 그의 동지들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기로 했습니다. 그해 11월 13일이었지요.
이를 경찰도 업주들도 가만둘 리가 없었습니다. 폭압적으로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시위는 계속되고 전태일은 진압에 맞서며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평화시장 앞을 달리며 외쳤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이렇게 청년 전태일은 22살의 나이에 제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숨이 진 것은 병원으로 옮겨진 뒤였는데, 당국이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건질 수 있는 생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가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한 말입니다. “어머니, 제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그러니까 전태일 그는 말하자면 어쩌다 혹 있을 수 있는,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에 해당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를 의인이라고도 열사라고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죄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요, 앞에서 말씀드린 여공이 아니라, 그녀들을 압제하며 착취했던 사업주를 위해 죽은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그런 일에 납득이 되시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뿐인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이를 무슨 말로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설명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없습니다. 없으니 바보처럼 입만 헤-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가슴속에서 들리지도 않는 소리로 이렇게 되뇔 것 같습니다. “은혜! 은혜! 사랑! 사랑!”
여러분, 스펄전 목사 있잖아요. 설교의 왕자라 불리는 그 유명한 찰스 스펄전 목사님 말에요. 그분께서 이런 말씀도 했답니다. “예수께서 연약한 자를 위해 죽었다는 말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앞에서 말씀드린 롬5:7-8 바로 앞 절인 6절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를 두고 한 말이지요
스펄전 목사님은 이 말씀을 설명하려 예화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이런 것이지요.

한 아버지가 아직 어린 소녀인 딸을 데리고 외출을 했습니다. 일이 있어 잠시 딸과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어떤 건물 앞에서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올 때까지 꼼짝 말고 여기에 서있어라.” 단단히 말해 두고 자리를 떴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일이 많았습니다.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며 분주하게 돌아다니느라 그만 딸의 일을 잊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집안은 난리가 났습니다.
아버지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건물 앞으로 헐레벌떡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있었습니다. 딸이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아버지를,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예화와 관련지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십자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으니 나는 십자가 밑에서 꼼짝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인가요.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그렇지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형틀이 십자가이고, 그러한 그분을 푯대로 하여 바라보며 달려가는 삶을 사는 것이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밑에서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나는 어떤가요. 십자가 그늘 밑에 좌판을 늘어놓아 장사판을 벌이고 있지는 않은지요. 아니면 돗자리라도 펴놓고 질펀하게 술판이라도 벌이고 있지는 않은지요. 설마한들 여러분과 제가 그러기야 하겠나요.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러나요, 그보다 더 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낮은 곳은 쉬이 보이지 않을 테니 교계의 높으신 어르신들 가운데에서 한 번 찾아보세요. 그렇지요. 금방 보이지요.
그런데요. 나라 해서 방심해선 안 됩니다. 나에게도 아담의 피를 이어받은 죄성이 남아 있고, 깨어 있지 않고 자칫 방심했다가는 나도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것을 찾는 마귀의 먹이 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70년 11월 13일, 청년 전태일이 그렇게 죽고, 그 열흘 후인 23일에 기독교계에서는 개신교와 천주교 공동으로 추모 예배를 드렸는데요, 거기에서 소천으로 지금은 계시지 않은 김재준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교회들과 성도라 불리는 크리스천들이 안타깝습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며 삿대질을 하는 사람뿐입니다. 모두가 의인이요, 선인뿐입니다. 우리는, 나는 아닌데 너희는, 너는 왜 내로남불이냐며 악을 쓰는 사람들뿐입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잠26:11)라서 그런 제가 부끄럽습니다.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서 죽는 것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죽음에서 보듯 어려운 일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밑에서 그분을 기다린다는 것은 전술한대로 그분만을 푯대로 하여 달려가는 삶을 사는 것인데요, 오늘의 교회는, 크리스천은 어떤가요. 그분처럼 사랑의 삶, 희생의 삶을 살지는 못할지라도, 그러려는 마음만이라도 가지고 있기는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십자가 밑에 돗자리를 펴 놓고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일삼으며, 더 나가서는 악행이라는 악행은 다 저지르면서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린다 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사과의 말씀: 저희 교회 주일 설교의 일부를 소개한다 해 놓고 쓰다 보니 제 생각이 더 많아지고 말았습니다. 제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동그리 21-06-25 15:55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님의 숭고한 정신에 깊이 머리숙여 애도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희생을 잊지않고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도록 기도드립니다.
로케 21-06-27 20:42
 
전태일 열사의 희생이 우리나라를 더 좋은 길로 가게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의 정신을 잊지않고 간직해 나가는 사회가 되었스면 좋겠습니다.
두필님 21-06-27 21:41
 
전태일님의 숭고한 희생으로 인해 앞으로 더욱 발전할 대한민국을 기대합니다.
항상 전태일님의 희생을 기억하고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백선희 21-07-08 09:17
 
사랑하고 희생하는 삶이 온 몸에 배어나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소피아 21-07-08 18:44
 
예수님께서 나같은 죄인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주님만을 기다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방심하지 않고 항상 깨어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윤지 21-07-15 09:42
 
한번씩 지치고 힘들때 예수님의 사랑과 지금의 우리를 있게한 선조들의 희생을 생각하고 마음을 바로 잡게 됩니다.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도록 더 베풀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강현 21-07-17 11:15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전태일님 항상 마음속에서  응원하겠습니다. 전태일님처럼  생각하면서 남을더 섬기고 , 아끼면서 사랑하겠습니다.
규연애비 21-08-05 16:36
 
전태일열사님의 희생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로케 21-08-06 14:09
 
전태열 열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나이를 먹으면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가슴과 뼈에 사무치는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평생 그 마음을 잊지않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봄날 21-08-24 21:15
 
늘 십자가의 사랑을 잊지않고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