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4-26 09:22
믿음으로냐? 행함으로냐?
 글쓴이 : 이다영
조회 : 345  
행위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제목만으로도 대부분의 여러분께서는 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지 짐작하셨을 줄로 압니다. 그렇습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냐 이행칭의(以行稱義)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실로 오랫동안 기독교계의 논란거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논란에 자주 등장한 말은 이신칭의이지 이행칭의가 아니지 않았나합니다. 따라서 이행칭의라는 말은 다소 생소한 느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자를 병기해 놓았으니 누구라도 그 뜻을 금방 알 수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사도 바울이 계기를 제공했고, 개혁자 루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말을 대충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3:28)는 것으로, 이신칭의란 이를 달리 표현한 것이지요. 이행칭의가 아니라 이신칭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중심사상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10여년 전 아직 가톨릭 수도사였을 때 어느 은둔수도회에 들어가 고행과 금욕의 수도생활을 하며 선행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내적 괴로움은 커져만 갔습니다. 성경의 율법과 수도사로서의 규율을 지키려 애를 쓰면 쓸수록 자신의 죄가 더욱 또렷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신부 앞에서 하는 고해성사가 잦았습니다. 고해성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죄가 생각나 되돌아가서 다시 그 고해성사라는 것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줄기의 밝은 빛이 어두운 마음으로 비쳐드는 것 같음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죄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있는 자신을 대신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 환희로 가슴에 밀려온 것입니다. 행위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천국법정의 재판장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십자가 공로로 인해 죄인에게 무죄판결 아닌 의인이라는 판결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여 주신다고 하는 일종의 법정적 행동을 하신 것이지요. 신학자들은 이를 ‘법정적 의’라 하는 모양인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집행이 드러나 있지요.


야고보서는 정말 ‘지푸라기 서신’인가?

그런데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루터는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행위에 방점을 찍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 폄하하는가 하면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를 폄훼하여 그의 사도성까지 의심했습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야고보서의 정경(正經·canon)성과 야고보의 사도성까지 인정치 않는 우를 범한 것이지요.
성경이 무오(無誤)하냐 아니냐의 논란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긴 하지만 기독교의 정경인 성경을 능가하는 기독교의 경전은 아직 없습니다. 그보다 권위 있는 경전은 아직 없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푸라기 서신 운운하며 일부이긴 하지만 그런 성경의 정경성을 의심하고 그것을 쓴 사도의 사도성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아무리 종교개혁이라는 대과업을 이룬 신앙상의 공로자라 할지라도 돌팔매를 맞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또 하나의 큰 과오가 있었습니다. 로마서의 이신칭의에 관한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다른 말씀은 차치하더라도 문제의 핵심에 있는 예의 1장 17절 말씀이 그렇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로 번역된 이 말의 원문 헬라어는 에크 피스테오스(ἐκ πίστεως)인데, 이는 ‘믿음에서부터’라는 의미이지요. 그리고 ‘믿음에’의 헬라어는 에이스 피스틴(εἰς πίστιν)으로 ‘믿음’의 방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는 ‘믿음에서부터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가 되는 것이지요.
이를 풀어 말하면, 첫 번째 언급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라 고백하는 믿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초보적 믿음을 말하고, 두 번째 언급된 ‘믿음’은 성숙해 가는 믿음, 성화를 이뤄 가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환언하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는 ‘하나님의 의’가 성도 누군가의 믿음의 출발로부터 도달점으로 가는 과정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고, 그 과정은 물론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그 ‘믿음’이 바로 행위를 수반한 그런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루터는 이를 간과한 것입니다.
그리고요, 로마서는 다 아시는 대로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쓴 편지라는 말이지요. ‘믿음으로 믿음에’의 첫 번째 ‘믿음’을 이미 소유한 자들에게 보낸 서신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루터가 말하는 칭의가 주어진 성도들이 읽도록 쓴 것인데, 그는 그것 또한 간과한 것입니다.
또요, 이신칭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은 로마서 말고도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가 더 있는데요,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를 말한 뒤에 반드시 행함을 말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니 신구약 66권 중 어느 것이 행함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요. 성경 66권의 대부분은 행동으로 채워졌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지요. 앞뒤의 한 면만으로는 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믿음이 수반되지 않은 행함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듯이, 행함이 따르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서의 말씀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2:17)이지요. 시체를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2:26)이라는데, 누가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히게 되”(2:22)는 것이니, “(믿음에 의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2:24)닌 것이지요.
물론 당시의 가톨릭의 신앙체계를 돌아다보면 루터가 ‘행함’ 아닌 ‘믿음’에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의 가톨릭은 구원을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선행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사람이 착하게 살면 그럴수록 자신의 의가 완성되어 가고, 그럼으로써 그것이 결국 어느 단계에 이르면 완전한 의인이 되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가톨릭은 면죄부 판매가 보여 주듯 부패의 일로로 내닫고 있었지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것이 루터 그가 면죄부를 부여받을 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무엇인가의 공로가 과오를 상쇄할 수 있다면 죄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선행을 쌓는 데에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가슴을 치다 못해 쥐어뜯는 몸부림으로 절규하는 사도 바울

사실을 말씀드리면 저는 지금까지 별로 쓰잘머리도 없는 말씀을 여러분께 드렸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이미 ‘믿음으로 믿음에’의 첫 번째 ‘믿음’을 소유하고 두 번째 ‘믿음’을 이뤄가고 있는 중이니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첫 번째 ‘믿음’) 성화를 이뤄 가고 있으니(두 번째 ‘믿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성화는 자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절대적인 역사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신은 두 손 놓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되느냐고요? 설마요. 그럴 리가 있나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고, 사람이 할 일이 따로 있는데요. 수험생이 공부는 하지 않고 시험을 잘 보게 해 주시라 기도드린다고 합격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을 보세요, 무엇 무엇을 해라, 하지 마라 하는 말씀들이 얼마나 많나요. 그런데요, 이는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인간에게 취사선택할 수 있는 기능이 주어진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스위치만 누르면 움직이는 장난감처럼 만드시지 않고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하도록 만드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는 필요 없는 것 아니냐고요? 아니지요. 필요하지요. 반드시,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해서 그대로 다 되나요.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의 역사인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화되어 가도록,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도록 도우시는 것이 보혜사 성령임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해야 하니 사랑하려 한다고 그대로 됩니까.
오죽했으면 바울이 지금까지 말씀드린 로마서에서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이어 한 말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3-24)이겠습니까. 가슴을 치다 못해 쥐어뜯는 몸부림의 절규이지요.
그렇습니다. 바울의 이 같은 모습이 예의 성화를 이뤄 가는 두 번째 ‘믿음’의 한 과정이지요. 어떻습니까. 여러분께서는 자신의 죄에 대해 이 같이 괴로워해 보신 적이 얼마나 있으신가요. 당연히 있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요, 많은 교회들, 그 성도라는 사람들을 보세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법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남을 비난하며 상처를 주는 것이 본업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이 준 상처에 아파하는 상대방을 보면서 자기가 이겼다고 의기양양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교회의 한 단면 아닌가요. 그런 사람들이 성도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며 악한 짓을 하는 행악자들 아닌가 말입니다. 빛의 차단자가 되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전도의 길을 막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믿음, 한나의 기도, 그런 건 성경에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죄로 인해 몸부림치며 절규하는 바울과, 죄를 짓고도 의기양양하는 행악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물론 그 차이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당신은 무어라고 생각하느냐고요? 예, 저는 바울에게서 행악자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성령님의 도우시는 역사를 느낍니다.
그런데요, 인간의 자유의지와 성령님의 도우심의 경계선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일까요. 그야 알 수 없지요. 저뿐 아니라 누구도, 아무리 대단한 신학자라 할지라도 그 선을 정확히 그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을 그으려 할 필요도 없고요.
우리는 다만 자유의지를 충분히 가동시켜 성화를 이뤄 가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니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기도고요.
사실 ‘믿음’ 그 자체만 해도 그렇게 간단하지를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 첫 번째 ‘믿음’ 같은 초보적 믿음이 있는가 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 같은 믿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물로 받쳤습니다. 실제로는 받치기 직전까지였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바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히11:18) 하신 말씀을 믿고,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19)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입으로 믿는다, 믿는다 한다고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예수는 그냥 적당히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죽게 되면 죽는다는 각오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롬14:8)이라는 각오와 결단으로 믿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인간들의 그 각오나 결단이라는 것은 그렇게 신뢰할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조그마한 자극, 손익에도 힘없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자유의지와 성령님의 도우심의 합작으로 아브라함의 그것과 같은 믿음으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고요. 잉태 전의 사무엘의 모친 한나의 기도와 같은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뭐라고요? 아브라함의 믿음, 한나의 기도, 그런 건 성경에나 있는 것이라고요? 아니지요. 기도로 매달려, 목숨 걸고 매달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의지함으로 일시적이 아니라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기도해 오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브라함과 한나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을지라도 그를 향해 성장해 가고 있음은 느끼게 되리라고 생각하는데, 아닐까요. 그리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의 삶을 책임져 주시리라 생각하는데, 그 또한 아닐까요. 만약 아니라면 성경도 거짓이고 기독교 신앙도 거짓이지요.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신칭의가 어떻고 이행칭의가 어떻다 이러쿵저러쿵할 일이 아니라 언행일치(言行一致)가 그런 것처럼 신행일치(信行一致)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동전의 양면이 합해져야 돈으로서의 가치가 있듯이 믿음과 행함이 어우러져 하나가 될 때(信行合一), 그것이 비로소 진정한 믿음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지탄의 대상이 된 우리 기독교가, 교회가,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을 내고, 악취 가득한 세상에 그윽한 향기를 내며, 소금으로 녹아져 사람 살맛나는 맛을 내는 것입니다.

윤지 21-05-04 10:06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 드리고 노력하겠습니다.
두필님 21-05-18 22:00
 
저부터 진정한 믿음을 이루어 나가면 언젠가는 살맛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만정 21-06-07 19:33
 
항상 말과 행동이 언행일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규연애비 21-06-10 11:45
 
언행일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관성으로 이루어져야지 그것이 더욱 빛을 바랄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둥이아빠 21-06-13 16:11
 
올바른 생각과 행동이 함께 이루어져 가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소망하여 봅니다.
이강현 21-06-14 19:31
 
예배시간이 되면 아무것도 모르고 시간이 흘러갔지만 목사님 설교말씀을듣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 힘들고 어려울때 하나님 찾는것이 느껴졌습니다. 예배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자 감사하라는 마음을 갖고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