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3-10 10:42
기도를 이루어 주시지 않는 이유
 글쓴이 : 이다영
조회 : 364  
기도를 이루어 주시지 않는 이유
― ‘다른 사람 어쩌든지’ 나의 기도는 이루어 주신다 ―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구하지 않는다고 모르시는 것이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목적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필요를 채워 주시라고 비는 데에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전적 의미도 어떤 절대적 존재에게 자신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한 것을 다 이루어 받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루어 받는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고도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개의 사람들은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아니면 기도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었나 보다 하고 지나치고 맙니다. 부족했으면 그게 얼마나 부족했고, 그 잘못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조차 해 보지도 않고 지나치고 맙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크리스천들은 무엇인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기도를 합니다. 전과 똑 같은 기도를 하는 것이지요. 이뤄 주실 리 없는 기도입니다. 그런데도 기도와는 상관없이 비는 것과 같은 결과가 나타나면 감사를 드리기도 하고, 아니면 기도드렸다는 사실조차 잊고 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감사를 드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요, 정말이지 심각하고 간절하게 기도드리고 그대로 되었는데도 기도를 이루어 주신 것이라 생각하기보다 그냥 자연히 그렇게 된 것처럼 지나치기도 합니다. 사실을 말하면 그에 대한 여부야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께서 이뤄 주신 것일 수도, 기도하지 않았어도 자연히 그리 되었을 수도 있지요. 그럴 경우 우리는 기도를 이루어 주신 것이라 믿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의 바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도드리고 결과가 그대로 나타나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확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당히 여기시는 그런 기도로, 드릴 때부터 이루어 주신다고 확신했던 기도이지요. 그런데 그런 기도를 드리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이 그런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니까요. 흔히들 믿음의 기도는 이루어 주신다 하는데, 믿음 없는, 또는 믿음 작은 사람이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는 없는 일이지요.
저는 이 글의 제목을 “기도를 이루어 주시지 않는 이유”라 달았는데요, 설마한들 이루어 주시지 않는 기도를 하자 해서이겠어요. 이루어 주시는 기도를 드리자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이루어 주시지 않는 기도를 드렸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이루어 주시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도자의 기도를 왜 이루어 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7:8)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도드리면 이루어 주신다 이토록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왜 기도를 이루어 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야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만 말씀드리려 합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약4:3)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기도를 이루어 주시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가 말한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상반된 의미가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지 않는 것이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이라는 말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2)라는 말씀에 이어 앞에 든 말씀(33)을 하셨는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즉 신앙에 속한 것이 아닌, 먹고 마시고 입는 것과 같은 육신에 속한 것을 먼저 구하는 게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먼저 구합니까. 사업의 번창, 취직, 자녀 또는 본인의 진학 같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나쁘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나쁘다니요.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것들이지요.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주신 달란트를 사장시키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충분히 활용하고 그럼으로 신장시키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인간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 즉 먹고 마시고 입는 것 같은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기도로 아뢰지 않아도 아신다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기도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요? 논리상 그렇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왜 그토록 기도하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지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요,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 하여 기도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역시 잘 아시지만 이 또한 당신과의 관계를 위해서 기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행함과 믿음과 기도와의 상관관계

‘알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는 ‘야다(ידע)’인데요, 그것의 헬라어 번역은 ‘기노스코(γινώσκω)’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봄으로 확인하여 아는 것, 즉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야다’도 ‘기노스코’도 ‘동침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요.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낳았는데요(창4:1), 그때 쓴 ‘동침’이 ‘야다’이고, 요셉이 주의 사자의 말에 따라 그의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아들(예수)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는데(마1:18-25), 이때 쓴 ‘동침’이 ‘기도스코’입니다.
지식적으로 알았던 하나님을 ‘야다’ ‘기노스코’처럼 체험적으로 알아, 부부가 서로 내밀한 데까지 속속들이 알듯이 하나님을 그렇게 알아, 그분과 더욱 친밀해지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적으로 알았던 성경말씀을 ‘야다’ ‘기노스코’처럼 알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육화(肉化)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요. 말씀의 육화, 그것은 성삼위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으로 ‘야다’ ‘기노스코’와 같은 맥락이지요. 우리는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찬송하는데요, 그리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 주시라고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내가 그리되어 갈 때, 말씀이 육화되어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聖化)되어 갈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형상으로의 변화가 ‘먼저’ 구하라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즉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이니 재언의 필요조차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요, 여기에서의 ‘먼저’란 단순히 시간적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의 병행구절 눅12:31은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라고 되어있는데요, 그리고 여기에서의 ‘다만’은 ‘오직’으로 옮긴 번역도 있는데요, 그 의미는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을 만큼’ ‘다른 것은 관계없이 전적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기도의 중심에 놓고 빌라는 것이지요. 진흙과 같은 나를 주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물론, 기도한 그것은 물론, 먹고 마시고 입는 것과 같은 육신에 속한 것까지 덤으로 그저 주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몇 십만 원짜리 의류를 사고 몇 천 원짜리 양말 한 켤레를 덤으로 받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런데요, 원하면 품질 좋은 옷을 준다는데, 싸구려 양말 한 켤레에 목을 매는 어리석은 짓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주시겠습니까. 아니다, 나는 열심히 기도하여 그런 걸 받았는데 무슨 소리냐고요. 물론 그런 경우도 적지 않겠지요. 불량식품이 해롭다는 것은 알지만 떼를 쓰니 하는 수 없이 어린 아들딸에게 사 주는 것 같은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도 어린아이로 머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조른다고 다 받는 것도 아니고요.
가장 좋은 것을 주시라 하면 준다는데, 망설일 것이 무엇입니까. 그에 비하면 한참이나 못 미치는 것을 구하여 이도저도 망치는 것은 왜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보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과 같은 육신에 속한 것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참된 크리스천이 아니지요. 지금 세상의 지탄거리가 되고 있는 명색이 기독교인이라는 자들을 보세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세상적인 것, 육신에 속한 것들에 눈이 먼 자들 아닌가요.
저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합당히 여기시는 기도란 드릴 때부터 이루어 주신다고 확신하는 기도라는 의미의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런 기도를 이뤄 주신다는 것은 당연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 말씀하시고, 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야고보 사도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에 이어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약1:6)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앞에서 확신하는 기도는 당사자의 믿음이 그리하게 하는 것이므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의 말씀도 드렸는데요, 백번 맞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구원은 행함 아닌 믿음으로 받는다고들 하는데, 행함과 믿음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어떻든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엡2:8,9)라 분명하게 말했지요. 그런데요,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라고 하는가 하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라고도 말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재언의 여지가 없지요. 만약 행함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 믿음이 아니지요. 죽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시체이듯 말입니다.
환언하면 행함이 없는 기도는 이뤄 주시지 않는다는 말도 됩니다. 좀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1-22)라고 말하는데요, ‘책망할 것이 없’고 ‘계명들을 지키’는 것, 그런 것이 ‘행함’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 ‘열매’란 ‘행함’의 결과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주문(呪文)이 되지 않게 하라

또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도 하셨는데요, 기도하는 사람은 그게 누가 됐건 ‘예수님의 이름’로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름은 단순히 이름만을 말하지 않고 그 사람의 전존재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요. 철저하게 종의 자리로 내려앉아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죽도록 사랑함으로 섬기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라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가운데 그분만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보자라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로 마친다 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의미조차 모른 채 그저 습관적으로 그리한다면 그건 주문(呪文)에도 못 미치는 것이 되고 말지요.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기도를 ‘향(香)’이라고 말합니다(계5:8, 8:3). “향연(香煙)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8:4)고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구약시대의 번제가 연상됩니다. 번제는 제물이 불에 태워지면서 연기로 하나님께 올라가 드려지는 제사인데요, 레위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물을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1:9)
‘죄의 삯은 사망’(롬6:12)입니다. 죄 없는 사람은 없으니 누구도 사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번제라고 하는 하나의 방편을 마련하셨습니다. 사람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 시켜 대신 죽임으로 그 죄인이 사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똑같은 죄인이지만 번제 같은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좋게 되었습니다. 나의 죄를 흠 없고 순전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지시고 십자가라고 하는 제단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기 때문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5:2)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신 말씀인데요,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가 된다는 말도 되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구약시대의 제사에 비유하고 있는데요, 여기에서의 ‘제물’은 구약시대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말하고, ‘희생제물’은 ‘짐승의 피를 뿌려 바치는 제물’를 말합니다. 환언하면 이 말씀에서의 ‘제물’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바치신 그분의 생애를 가리키고, ‘희생제물’은 십자가상에서의 희생을 가리킨다는 말이 됩니다.
저는 앞에서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香)’이라는 의미의 말씀을 드렸는데요, 아니 제 말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요,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상의 죽음이 ‘향(기)’라면 우리의 기도는 어떠해야 되는 것일까요. 우리의 삶도, 일상도 기도의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기도는 기도 삶은 삶, 우리는 지금까지 그처럼 삶과의 괴리가 큰 기도를 드려 온 건 아닐까요.
요일5:14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 말하는데, 그 뜻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구하라 하신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이지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말입니다. 세상적인, 육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을 구할 때 세상을 살아가며 필요한 육적인 것은 그저 덤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뤄 주시는 기도의 조건으로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드리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밤중에 떡을 꾸러 온 친구의 비유(눅11:8)가 그렇고,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18:1-8)도 그렇습니다. 이중 전자는 ‘강청’ 즉 ‘간절함’을 말하고 있지만, 그에는 ‘지속적’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번제의 연기가 향기로 피어올라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시는 것 같은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은 기도가 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온몸과 온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심령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 즉 자기의 전존재를 남김없이 몽땅 바치는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기도는 드리고 싶다고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27) 이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기도를 조금이라도 열심히 하시는 성도라면 이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체험해 왔을 줄로 압니다. 열심히 많은 기도를 했는데도 그런 건 느껴 본 적이 없다고요? 그렇다면 자신이 한 기도에 대해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그러니 일단 기도를 시작하면 그  본령에 들어가기 전에 성령의 도움부터 청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고전2:10)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혹자는 “내게 부르짖으라”(렘33:3) 했다며 큰소리로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큰소리로 부르짖어 하는 기도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우리 한번 같이 생각해 봅시다. 큰소리가 옆에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방해가 된다면 어떨까요. 주택이 밀집한 동네의 한가운데에 있는 교회에서 민폐가 될 만큼 큰소리로 기도한다면 그건 어떤가요.
우리는 사무엘을 갖기 전에 한 그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알고 있습니다. 그때 한나는 여호와의 전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갖지 못해 괴롭힘을 당한지라 그로 인한 슬픔으로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했습니다. 이를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보고 있던 제사장 엘 리가 ‘술에 취한 줄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기도를 마친 한나는, ‘다시는 근심의 빛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로 확신했던 것이지요. (삼상1:1-18 참조)
제사장 엘리는 겉으로 나타난 것만 알뿐 내면은 알 수가 없었으나 하나님은 아니시지요. 우리의 머리털 하나하나까지도 다 세신 바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큰소리가 아니라고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사람에게 그리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소리 없이 내면으로 부르짖는 것도 그대로 다 들으신다는 말입니다.
저는 기도를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합니다. 입술조차 딸싹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밋밋한 기도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면에서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풍랑이 거칠게 일어도 그렇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믿’에 힘을 주어 기도하는 사람도 많은데요, 그런다고 믿음의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잘 믿어지지 않으니까 억지를 부려 그러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우리는 불꽃같은 눈(계2:18)으로 각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살전2:4)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 어쩌든지’ 나의 기도는 이루어 주신다

저에게는 아주 친하게 지내는 장로님 친구가 한 분 계십니다. 알게 된지 그리 오래된 건 아닌데, 죽이 아주 잘 맞아 흉허물 없이 지내는 사이가 됐습니다. 저보다 두 살이나 위로 선배라 해야 맞지만 그가 친구로 터놓고 지내자 해서 그리된 것이지요. 사실을 말하면 말이 친구이지 제가 존경하여 마지않는 분입니다. 특히 신앙적으로 그렇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서너 시간, 네댓 시간씩 기도하는 분이지요. 매일의 일과가 기도와 성경읽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분입니다.
장로님은 그런 자신을 가리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은총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일을 해야 하니 그럴 수가 없을 것이라는 거지요. 세상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다 내려놓고, 그러며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소원이라며 그것이 자기의 기도의 제목이라 하기도 하는데, 젊은이로서는 어려운 일이니 그 또한 나이 많은 사람에게 주신 은총이라 하기도 합니다.
장로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이뤄 주실 것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황당해 할 내용의 기도도 하는데, 그 또한 이뤄 주실 것을 확신한다 합니다. 찬송가 349(통389)장을 부르며, 그 후렴의 ‘다른 사람 어쩌든지 나 주님의 용사되리’라는 가사에서 ‘다른 사람 어쩌든지’ 자신의 기도는 이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확인했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요, 자신이 드린 기도를 이뤄 주실 것이라는 확신, 그것이야말로 기도를 이뤄 받는 핵심사항입니다. 믿음의 기도의 중핵이지요.
그런데요, 믿음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믿음이 필요할까요. 하나마나한 말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우문에 우답이 되겠지만, ‘하나마나한’이라는 말이 두말할 것까지도 없이 확실하다는 뜻도 내포한다는 면에서 본다면 현문에 현답이기도 한데,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겠지요.
(내킨 김에 이 글의 결론을 말씀드리지요.) 그렇다면 바른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그야 전술한 것처럼 행함이 수반된 믿음이지요. 그러니까 기도를 이뤄 받기 위해서는 삶으로 이어지는 기도, 삶 전체가 기도가 되는 그런 기도를 드려야 하지요. 삶과 괴리된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중핵으로 하여 구해야 이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 이뤄 받은 결과는 어떤 것으로 나타나는 것일까요.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5) 예수님의 말씀인데요, 여기에서의 ‘너희 빛’이란 실은 우리들 인간의 빛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가 됐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발광체가 아니거든요. ‘참 빛’(요1:9)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신데, ‘사람들의 빛’(요1:4)이라 함도 실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그 빛인 것이지요. (요1:1-14 참조)
그런데 이 말씀에서의 ‘너희 빛’은 ‘너희 착한 행실’로, 곧 우리 믿는 사람들의 ‘착한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의 구체적인 모습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달리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지요. 그것으로 끝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최고봉이지요. 
그렇다면 그런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무슨 유익이 되는 것일까요. 기껏 잘 나가다가 무슨 뚱딴지같은 세속적 말이냐고요? 그래요.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본래가 세속적으로 이기적 존재거든요. 뭔가 이익 되는 거가 없으면 움직이려 들지 않지요.
그런데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물인데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그분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온 우주와 그 가운데 세상은 창조주의 창조섭리와 뜻에 따라 돌아가고 있는데, 그분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 그에 순응하는 것이지요. 유교식으로 말한다면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하는 것이지요. 
물이 높은 데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순리이듯 사람이 창조주의 창조섭리에 따라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순리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행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요새’가 되어 주시며, ‘방패’도 되어 주십니다. ‘날개 아래’ 피하게 해 주십니다(시 91편 참조). 안식처가 되게 해 주시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전지(全知)하심은 전능(全能)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습니다.(마19:26) 무엇이 됐건, 사람들이 불가능하여 황당하다고 생각되는 것까지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 같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드리는 것입니다. 땅을 보고 사람을 봐서는 믿음의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라”(약 5:13,16)라는 말씀도 있는데요, 여기에서의 ‘의인’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려는 신실한 성도를 가리킵니다. 삶을 기도의 연장선에 놓고 사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일수록 땅엣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를 드릴 수 있어 확신이 가능하고, 따라서 이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구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뿐 아니라 먹고 마시고 입는 것과 같은 육신에 속한 것까지도 말입니다.

윤지 21-03-12 09:47
 
교회를 다니던 어린시절 욕심을 채우기 위해 드리던 기도가 생각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부끄럽습니다.
백선희 21-03-14 09:02
 
믿음의 기도라는 말씀이 제 생활에 적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주아빠 21-03-14 09:06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경속의 믿음의 인물들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너무나 어려운 삶이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기도와 말씀이 제 생활에서 함께 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소피아 21-03-15 09:04
 
나의 유익을 위해서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기도하는,  삶을 기도의 연장선에 놓고 사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율리아나 21-03-15 13:46
 
삶과 괴리되지않는 참된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다영 21-03-18 14:46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삶 전체가 기도가 되는 그런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훈훈 21-03-20 09:32
 
성경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항상 기도 드리겠습니다.
행복가득 21-04-03 15:32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를 내 욕심대로 받으려고만 하는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래 알겠다 그렇게 해주마라고도 하고, 안돼 그것말고 다른방법으로 라고도 하고, 기다려하고도 합니다
이 모든것이 기도의 응답이지요 그래서 기도하는대로 이루어집니다.
두필님 21-04-06 22:56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봄날 21-04-21 22:26
 
온전히 하나님 앞에 합당한 기도만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규연애비 21-06-10 11:47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과 성경에 나와있는 말씀대로 살도록 노력합니다